[바낭]그래, 지금이 맞다

2015.09.25 10:26

SUE 조회 수:1448

어제 개봉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봤습니다.

저는 홍상수 감독과 그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보고

지금껏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건 좋아한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어떤 영화도. 심지어 홍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도 

제게 이런 감정을 전해준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를 믿지 않으며,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느낀 감정을 곱씹어 보는 지금까지도

어떤 영적인 교감이었다-고 밖에는 표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제 언어능력이 일천해서 매끄럽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마치 덕이 무척 높은 고승을 마주한 것 같은 시간이었달까요.

오랜만에 본 홍상수 감독님은 은은한 빛이 나시더군요.

목소리는 전보다 더 울림이 좋아졌구요.

 

집에 가면서,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어제 녹음한 GV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복식호흡을 하면서요. 매일 아침 지옥과도 같았던 전철안이

마치 내 방안처럼 느껴지더군요. 이 기분도 말로 표현을 잘 못하겠네요.

아무래도 정리할 시간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들떠 있어서 그런가봐요.

어버버버버.

홍상수 감독님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씨네큐브에는 여러개의 출입구가 있습니다.

GV가 끝나고 저는 그중에서 사람들의 이용이 적은 출구 쪽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대로변 길보다 뒤쪽 길로 걷는  시간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거기 홍상수 감독님과 허문영 평론가가 계시더군요.

 

평소의 저라면, 방해될까 싶어 조용히 비껴갔을 겁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가벼운 목례도 못해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오는 것도, 알려진 사람들에게는 피곤할 일일거라고

늘 짐작해왔고요.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성큼성큼 다가가서 감독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다고 말했어요.

도움이 많이 됐다고요.

그런데 그 순간 어린애처럼 으앙 울음이 터져버렸지 뭡니까.

얼마나 당황하셨겠어요. 죄송하게도, 그런 뜬금없는 자에게

홍상수 감독님께서는 악수를 먼저 청해주셨어요.  

열심히 살겠다는 말이 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엔.

그리고 꾸벅하고는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허리를 쭉 펴고요. 

 

저는 틀이 많은 사람이에요. 저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에

가둬져 있기를 좋아하는 편이죠. 그걸 스스로 즐긴다고 여겨왔고요.

심심한 게 뭔지 잘 모른다는 말은 평소에 제가 참 자주 쓰는 말이에요.

한가지가 잘못되면 '망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인생을 스위치만 껐다켜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비수처럼 늘 품고 다닙니다.

제대로 살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대로 산다는 것도 모호하지만

조금 선명하게 떠올려보면 '제대로'라는 기준이 제 것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는 것은 욕심일테지만,

저는 늘 그 욕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을 일기에서조차도

그런 욕심으로 그득했어요.

그렇다고 그에 걸맞는 성실함을 갖춘 것도 아니라서

하다 말거나, 시작조차 못한 것 투성이였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늘 전체를 보려다가 중요한 것들을 놓쳤죠. 

지금은 다행히 섣불리 조언을 하지 않습니다만

전에는 지엽적인 것보다는 전체를 보라고 어쭙잖은 충고도 일삼았죠.

 

 

(먼산 바라보기)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외치며 새벽 2시까지 펑펑 울고나서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길이 조금 달리 보였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얕잡아보이지 않으려고 그간 얼마나 스스로를 힘들게 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때론 나자신도 나를 모른다-고

잘난척 하며 안간힘으로 버텼던 날들이 문득 가엾더라고요.

나를 무시하고, 얕잡아봤던 건 다름아닌 나 자신이였다는 걸

자존감이 높고 자의식이 강하다고 오해했다는 걸

오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건줄만 알았는데 말예요.

뛰어들기 보다는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용감해져야겠어요. 두려움을 무작정 끌어안으려하지 말고

마주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s GV 아쉽게 참석 못하신 분들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

녹음한 것은 곧 풀어올리겠습니다.

감독님 말씀 듣다보면 가끔 단어를 고르는 건지, 생각을 다듬는달지, 말씀하시다말고

가만히 멈추는 순간이 있는데,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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