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기 13


2015년 3월 28일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

2015년 4월 언젠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

2015년 4월 17일 임권택의 화장

2015년 4월 19일 이석훈의 해적


0. 내용 상세하게 다 있습니다. 


1.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


 이 영화는 제가 2015년 현재 (8월 13일)까지 본 올해 최고의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따로 긴 글을 쓸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생략.


2.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 원제 블로우업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싱거웠습니다. 아무래도 제 취향은 밤과 일식이었던 것 같네요.

 블로우업은 사진작가의 권태를 다룹니다. 그는 성적인 욕망, 부귀영화에 대한 욕망도 지지부진해진 상태입니다. 이미 욕망의 충족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있는 상태의 사람이죠. 딱 봐도 유명해보이는 그에게 사진찍히기 위해 일군의 어여쁜 모델들(제인 버킨!)도 찾아올 정도입니다. 모든 게 껌처럼 쉬워서 그런지 그는 오히려 진부함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미스테리어스한 공원의 커플, 딱 봐도 나이차 좀 있어보이는 남자와 여자, 아름답고 신비하며 다른 모델들처럼 가볍지 않아 보이는 여인, 모든 게 새롭고 재미납니다. 그렇지만 뭐, 영화는 가면 갈수록 그 뚜렷하지 않은 사진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는 사진작가를 허망하게 뒤쫓습니다.

 이 영화를 봤을 때를 회상해보면,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 사람들 대부분이 이 영화의 철학적 깊이나 의미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이 욕망 같은 경우 신선하고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뻔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여자 관계를 상상했습니다. 단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자관계만이 아니라 얽히고 섥혀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도 말이에요. 이건 제가 우연히 보았던 단편적인 정보들을 토대로 만들어낸 상상도나 다름없습니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안토니오니가 만났던 새파랗게 어린 여자(나이 차이가 19살이었죠)인 모니카 비티는 그의 대표적인 뮤즈 중 하나였습니다만, 욕망의 여주인공 격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그녀는 비티보다도 대충 다여섯살 어립니다.) 때문에 그 둘은 결별했습니다. 그런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제 우상인 잔느 모로에게 남자를 빼앗긴 적이 있어요. 남자는 누군지 기억이 안 납니다. 사실 빼앗긴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전혀 쓸데없는 제 상상도 감독이 형상화 하려고 한 시각적인 욕망과 상관 있습니다. 저는 젊고 아름다운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그녀를 탐미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제 안의 어떤 감흥과 조우한 것이죠.이렇듯 감독이라는 위치의 사람이 갖는 욕망을 탐구해보는 건 찍힌 사진에서 보이지 않지만 보일 듯한 무엇인가를 골몰히 찾는 거랑 큰 차이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을 갖고 탁구든 테니스든 찧고 까부는 거랑 멀지 않다는 겁니다. 공이 없어도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분명히 소리내며 존재하는 건 인간의 변태 같은 욕망입니다. 제 경우에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남들의 사적인 영역을 blow up해서 보려고 했던 것이죠. 이렇게 보니 안토니오니는 참 인간 내면을 잘 이해한 사람 같네요. ㅎㅎ 

 


 

 

3. 임권택의 화장


 이 영화가 칼의 노래를 쓴 작가 김훈의 소설을 극화한 것이라는 정보는 듀나의 리뷰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짐작컨대 원래 소설은 훨씬 뻔뻔하고 징그러운 중년 남성의 심리와 맞닿아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영화는 별로 그런 느낌 없었습니다. 저는 잘 보았습니다. 거장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흠이 크긴 한 영화였지만요. 이 작품은 장점과 단점이 매우 뚜렷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비극적인 상황과 정서를 색욕과 함께 버무려내야 했던 작품이었습니다. 감독은 그 두 부분을 잘 살려 보이기 위해 노력을 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비극의 구현입니다. 연기는 안성기와 그의 아내이자 암투병 환자 역으로 최선을 다해야 했던 김호정, 그 둘다 나무랄 데 없습니다. 안성기의 연기를 제대로 본 건 이번이 개인적으로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역시 '클래스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역에 대한 이해도가 100% 되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김호정 씨도 마찬가지였고요. 다 늙은 부부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나긴 애증의 묘사를 잡아내는 것도 훌륭했습니다. 이 부분, '화장' 안에서 나와주어야 한 비극적 정서의 모든 구현은 정석적인 측면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점이 너무 심합니다. 거장이 만들었다고 하기에 너무 흠이 클 정도에요. 그건 바로 색욕과 관련한 부분입니다. 안성기는 젊은 부하직원인 김규리에게 색욕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쪽 구현은 완전 꽝이에요. 어떻게 꽝인지 조목조목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장면은 안성기와 회사부하들이 어떤 클럽인지 라운지인지 가서 술 마시고 노는 대목입니다. 저는 무슨 소주 광고 보는 줄 알았습니다. 예술 영화에서 갑자기 무슨 이효리든 신세경이든 누가 나와서 처음처럼 외칠 기세였습니다. 지나치게 밝은 조명, 지나치게 부각되는 여자배우, 모든 것이 다 이상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어떤 술집, 클럽, 라운지에서 저렇게 노나! 그리고 어떤 영화가 저 장면을 저렇게 잡나!' 수만 번 외쳤고, 민망해서 영화관에서 킬킬 댈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김규리와 젊은 여자 즉 색욕을 다루는 모든 장면, 모든 대사가 다 좀 어색하거나 진부하거나 뻔합니다. 클리셰적인 상황이야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걸 잡아내는 영화의 손짓은 서툴기 그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30초 광고에서도 충분히 발산됩니다만, 그건 상업예술이기에 허용된 인위성 안에서나 인정 받습니다. 이야기를 갖고, 정서를 갖는 영화에서 그런 부분이 생기는 순간 영화는 바로 아웃이라 생각합니다. 

 왜 거장 임권택 같은 사람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아니, 실수일까요...? 제가 그의 다른 영화들을 다 본다면 더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저는 딱 그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이 현재 세대의 욕망과 그를 다루는 영화들을 잘 안 보셨거나, 정말 관심이 없으시구나. 하긴 노장으로서 그분이 훨씬 많이 보시고 경험하실 이야기들은 암투병하는 배우자를 돌보아야 하는 중년 혹은 노년의 비애라는 부분일 것입니다. 젊음과 생명력으로 넘쳐 나는 깊은 쾌락의 구렁텅이는, 어쩌면 거장 감독이 근래에는 바라보지 않고 사셨을 삶의 단면일 수도 있겠죠. 저는 그런 생각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을 바라보고 표현한다는 데 있어서는 기쁨과 고통, 그 양면을 다 직시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거겠죠. 


4. 이석훈의 해적


 짧게 쓰겠습니다. 뭐,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름 재밌게 봤습니다. 즉, 제 돈 주고는 안 보지만, 우연히 보면 뭐 ... 나쁘지 않은 그런 정도의 수준? 정석적인 차원의 영화입니다. 자기 수준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에 맞추어서 만든 영화입니다. 그 정도도 하기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저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절제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로맨스가 필요한 부분에서 드라마 로맨스를 깔아주고, 액션이 필요한 부분에서 액션이 나오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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