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있어요.)

지난 시간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정말 길더군요. 12시에 모여 5시까지 스트레이트로 다 읽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머리가 띵했습니다- 를 읽고 나서 우리가 구세대 남자작가들의 내면을 이해하려고 너무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희곡의 길이가 긴데서 온 피로감이겠지만 지난 만 삼 년 간 희곡모임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입센, 체홉,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 등 완전 고전 위주로 약간은 의무적인 독서를 해오지 않았나 싶고 이제는 진짜 재밌는 거, 감정이입 잘 되는 거, '음, 이건 페미니즘의 수혜를 받지 못한 지난 세기 남자의 글이니까'라고 봐주지 않아도 되는 거, 가능하다면 현대-여성 작가들 걸로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른 건 곰브로비치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였습니다. 뒤렌마트 희곡선이나 에스더 채의 [그리하여 화살은 날아가고]를 읽을 뻔 했는데 모임 분과 얘기하다가 충동적으로 곰브로비치로 정해버렸어요. 트위터에서 이 작가 소설 좋다는 얘기를 들어온데다 이 사람 희곡 읽다가 외출했는데 끝이 너무 궁금해서 집에 오자마자 마저 읽었다는 트윗을 보고는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고요. 그리고 고백하자면 무슨 공주, 왕자, 결혼식 나오고 핑크색 커버에 가름끈도 깔맞춤한 고운 분홍이길래 예쁜 여성 판타지물인 줄 알았습니다-.-;

일단 책 사놓고 읽지는 않고 모임 공지메일만 돌려놓고 있다가 모임 전날밤 읽는데 아이고야, 로맨틱한 내용이 전혀 아니고 스트린드베리 풍의 부조리극이더군요. 재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대와는 다른 재미였습니다. 코미디라면 코미디인데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고 블랙 코미디. 코미디보다 블랙 부분이 훨씬 강합니다. 서민계급 여성을 며느리로 맞게 된 상류층 부부의 위선과 허식을 비웃는다는 점에서 정성주 드라마 작가의 [풍문으로 들었소] 생각난다는 분도 계셨고, 부르주아들이 모여 완벽하게 격식을 갖춘 식사를 하고자 하나 번번히 깨지는 내용인 루이스 브뉘엘 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 떠오른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생각 많이 났습니다.

타이틀롤인 이보나는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초중반까지 대사가 없다가 막판 반전을 멋지게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니라 끝까지 자기 목소리 없이 주변 사람들의 지독히 편견에 찬 대사로만 몇 줄 묘사되는 인물입니다. 그들의 묘사에 따르면 이보나는 굉장히 못생기고, 섹스어필이 전혀 없으며, 더럽고, 의미 있는 말이건 의미 없는 말이건 말 자체를 아예 안 합니다. 왕을 만나면 고개 숙여 인사한다는 기본적인 법도를 모르거나 알고도 무관심하며(그녀에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왕가 전체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시범을 보이는, 즉 그들이 거꾸로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게 1막 마지막 장면입니다), 바닥 대신 의자 위에 앉는 기초적인 행위조차 못해서(혹은 안 해서) 왕자가 그녀의 엉덩이에 의자를 조준해 앉히는 몸개그 장면이 연출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보나의 존재만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점점 광기에 빠져듭니다.

왕은 자기를 겁내는 이보나에게서 과거 자기가 죽여버린 여자 재봉사를 떠올립니다. 궁에서 이보나와 마주칠 때마다 왕은 자기의 죄악과 대면해야 해서 우울합니다. 왕비는 자기가 몰래 쓰고 있는 유치하고 음란한 시가 이보나와 꼭 닮았다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사람들이 이보나를 볼 때마다 자신의 내면이 폭로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낍니다. 왕자는 이보나에 대한 즉각적인 거부감에 굴복하기 싫어서 이보나와 결혼하겠다고 고집부렸지만 막상 이보나가 자신을 쳐다보자 혹시라도 이보나가 자기를 사랑할까봐, 그 일말의 가능성만으로도 너무나 역겨워져서 옆에 있던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집니다(혹은 사랑에 빠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보나가 존재하는 한 자신의 새 사랑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이보나가 자기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고 느끼며 그래서 이보나를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다음은 모임 분들의 코멘트:

-여기서 이보나가 고결하게 묘사됐다면 뻔하게 느껴졌을 거에요. 이보나를 선하고 고결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얄팍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상류계급에 대한 풍자물인가 했는데 읽다 보니 배경이 꼭 왕궁일 필요도 없고(이건 작가가 귀족 출신이라 자기에게 익숙한 툴로 풀다보니 그렇게 된 듯) 현대 아무 가정이나 학교 교실이나 회사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얘기네요.

-집단에서 눈에 띄게 다르거나 약하거나 거슬리는 사람을 괴롭히면서 그 괴롭힘을 합리화하는 걸 잘 그렸죠. 저마다 자기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어두운 충동들을 그 존재에 투사하는 것이라든지요.

-그러면서 그 괴롭힘 당하는 존재가 한 집단을 광기로 몰고가는 지점까지도 그렸고요.

-그런 이야기의 원조? 전형? 거의 클래식 같아요.

-계속 등장은 하는데 대사가 한 마디도 없는 인물이 있으니까 희곡 읽으면서도 좀 신경 쓰이더라고요?

-실제 무대화할 땐 이보나 역에 어떤 배우를 쓰고 어떤 연기를 시킬런지 궁금해요. 존재감이 없는 배우? 존재감이 강한 배우? 일단 이 희곡을 무대에 올리려면 머리가 깨지겠지만.. 역시 그냥 읽으라고 쓴 희곡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 자신도 무대에 올린 이 극은 안 보셨다고..

-대사는 없지만 그 묘사로 짐작하건대 존재 자체가 굉장히 강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배우여야 하지 않을까요? 외모만으로도 존재감 큰 배우여야 할 것 같고..

-전 인형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본극에서처럼 검은 옷 입은 인형술사들이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이미지도 어울릴 것 같고요.

-혼자 읽으니 골 때리던데 여럿이 모여 읽으니까 웃기네요.

-네,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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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66회 희곡모임 후기였습니다. 다음 모임에서는 곰브로비치 희곡집에 두번째로 실린 작품 [결혼식]을 읽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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