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남진우 교수(명지대 문예창작학과)가 부인인 작가 신경숙의 표절과 관련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 교수는 지난 6월 사건이 불거진 뒤 침묵을 지켜 왔다.
“지난 여름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례적일 만큼 우리 문단과 사회를 달구고 있는 ‘표절’과 ‘문학권력’이란 주제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정리된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남 교수가 <현대시학> 11월호 권두시론으로 쓴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표절에 대한 명상 1’이라는 글 앞부분이다. 자신의 글이 신경숙 표절 사건과 그에 이은 문학권력 논쟁을 겨냥한 것임을 분명히한다. 그는 이어 “지금 우리 사회에선 표절이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양심의 문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 선악 이원론적 판결이 요구되는 법정으로 직행하곤 하는데 문학 예술의 창작에서 표절은 종종 텍스트의 전환, 차용, 변용 등의 문제와 결부되어 숙고해야 할 점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숙고를 회피한 채 이루어지는 표절 논란은 대부분 무분별한 여론 재판이나 ‘잘못의 시인’ ‘선처에 대한 호소’ ‘대중의 망각’으로 이어지는 막간의 소극으로 귀결되기 쉽다”고 씀으로써 신경숙 표절 논란이 ‘선악 이원론적 판결’과 ‘무분별한 여론 재판’으로 흘렀다는 판단을 내비친다.
남 교수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언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활동한 가공의 작가 메나르는 세르반테스 소설 <돈키호테>의 일부를 똑같이 썼는데, 17세기 스페인과 20세기 프랑스라는 환경과 문맥의 차이 때문에 두 작품은 같으면서도 다른 작품이 된다. 남 교수의 표현대로 이 작품은 “문학이라는 것이 끝없는 그리고 끊임없는 다시 읽기/쓰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 ‘불운’(Le guignon)과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시 ‘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를 비교한다. 아래 인용에서 확인되듯 보들레르의 4연짜리 시 3연과 4연이 그레이 시의 번안임은 보편적으로 합의된 사실이다.

“-수많은 보석들이 잠자고 있다./ 어둠과 망각 속에 파묻혀,/ 곡괭이도 측심기도 닿지 않는 곳에서;// 수만은 꽃들이 아쉬움 가득,/ 깊은 적막 속에서,/ 비밀처럼 달콤한 향기 풍긴다.”(윤영애 옮김 ‘불운’ 3·4연)
“보석과도 같은 지극히 맑고 고요한 빛이/ 깊고 깊은 어두운 동굴 같은 바다에 가득하고;/ 꽃들은 보는 이 없는 곳에 가득 피어 저 혼자 얼굴 붉히며/ 그 향기 허공에 헛되이 뿌린다.”(‘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 14연, 옮긴이 미확인)

뿐만 아니라 ‘불운’ 1연의 4행 “‘예술’은 길고 ‘시간’은 짧은 것”은 히포크라테스의 금언을 패러디한 미국 시인 롱펠로의 시 ‘인생 찬가’(A Psalm of Life)에서 가져온 구절이며 2연의 1~2행은 그레이의 시에서 유래한 것이고 3~4행은 다시 롱펠로한테서 따온 구절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 고유의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시피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표절 작품으로 비판받는 대신 보들레르 문학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것이 보들레르의 위대함이라고 남 교수는 판단한다.

“우리는 보들레르의 번안에 의해 그레이의 그 구절이 함축하고 있던 최상의 순간을 맛보게 되며 그레이의 의도를 넘어서 그 구절이 현현하는 놀라움과 조우하게 된다”는 대목은 “(미시마 유키오 소설에 비해)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는 창비 문학출판부의 최초 입장 표명을 떠오르게 한다.

남 교수는 보들레르가 가져온 그레이의 “시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이 다른 사람의 시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노튼 영문학 개관 1>을 인용한 다음 이렇게 글을 맺는다.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것, 글을 쓰고 또 읽는다는 것은 이런 상호텍스트성의 거대한 그물망에 참여하는 것이며 (…) 표절은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 그것도 시작의 시작에 불과하다. 창조의 낙원 속에 이미 모방이, 영향이, 표절이 뱀처럼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남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현대시학> 12월호에 실릴 다음 글에서는 20세기 중후반 독일 시인과 20세기 후반 한국 저항시인의 ‘표절’ 문제를 다룰 예정”이라며 “한국 신문학 전반, 특히 90년대 이후 표절 논란이 인 작품들에 대한 내 나름의 견해가 있지만 잘못하면 한국 문학 전반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어서 상한선을 어디까지 그을 것인지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전설’을 비롯한 신경숙씨의 작품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논의를 하는 게 좋겠다”고 선을 그었다. “신경숙씨는 내가 그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하며 이 글이 실리는 것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 남 교수는 “올 여름에 일이 터지기 전부터 이 주제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료도 모아 왔다”며 “그동안 창작에 주력하느라 손을 놓고 있었지만 더는 내버려 둘 수 없게 되었다”고 각오를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출처: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29491




저는 이 분이 그냥 가만히 계실 줄 알았는데 의외입니다. 이인화를 무라카미 하루키 표절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신 분이 어떻게 이런 내로남불을... 아내 문제에 아무래도 비판하기 쉽지 않을테고. 침묵하는건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는데, 이건 생각 외네요. 제가 뭔가 잘못 이해하는 건지... 이인화나 신경숙 모두 문장 자체가 아주 비슷해서 문제가 된 것을, 어떻게 사안마다 이렇게 다르게 반응하는지 신기하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너무 유명해서 읽은 적 없다는 변명이 안 통하고 신경숙은 읽은 적 없다는 걸 받아들여라는 건지, 아니면 빌려온 건 맞는데 표절로 시작해서 작품으로 완성했으니 된거 아니냐는 뜻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세상이란 이런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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