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0 21:58
1_ 제가 욕망에 차올랐던 몇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씩 어떤 소설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글을 쓰고 싶게 만들어요. 오래되서 어떤 소설들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발터 뫼르스의 글들이 가끔 그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그랬어요. 저는 하루키의 빡빡한 묘사 쪽을 좋아하고 느슨하고 어디가 어딘지 모를 묘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이영도의 책도 그런 편이었고. 기억난 김에 [첼로]나 다시 읽어야겠군요. 그런 감정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릿저릿과 짜릿짜릿의 사이 쯤에 있는, 뭔가가 신경을 곤두세우는거죠. 가만히 있으면 안될 것 같은.
글을 하나 둘 쓰면서 글을 쓰기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어요. 이유는 모른다고 하죠. 뇌가 열심히 글을 쓰지 않아도 될 이유들을 찾아와요. 그런 걸 보면 뭔가가 있기는 있나보다 싶죠. 좋아하는데 하지 말아야 할 것. 그렇지는 않지만, 행복할수록 불안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더욱 더욱 행복해질수록 싸- 한 공포가 밀려오는 그런 것 말이에요. 음...
제가 글을 쓸 때의 머리 속 상태를 그려보도록 하죠. 일단 밀가루로 만든 반죽같은 소재가 있을 꺼에요. 생명력을 가진 그 소재는 통로를 통해 외부로 나가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절단기가 잔뜩 달린 철제 거미 다리 같은 것들이 난타를 치듯 소재들을 잘라낼 꺼에요. 제 손을 떠나면 그건 이제 제가 아니고, 빵이든 그림이든 남이 해석하는대로 이해가 될 것이니까요. 글을 자주, 길게, 생각없이 쓴다는 것은 편집기를 둔화시킨다는 이야기죠. 통로를 망가트리면서 소재가 원본 그대로 나갈수록 저는 참을 수 없어지는 거죠. 말해도 되는 영역과 말하지 말아야 할 영역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거에요.
2_ 그런 경우가 있어요.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씩 활로가 막히는 거에요. 이런 식입니다. 어떤 특정한 소재 하나를 이야기하는 건 점이죠. 한 점에 맞닿아 있는 선은 무한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해요. 하지만 우리가 대화할 때는 부피가 있는 점이라고 해야 할까, 한 마디를 던져도 상당히 해석의 범위가 줄어드는 경우가 있죠. 그리고, 다섯 개의 점을 찍는다고 하면 각각의 점을 잇는 선들은 정해진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이런 두 가지 경우에서 새로운 점을 추가할 때, 나머지 점과의 각도에 대해 눈치를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우습게도 자승자박이 되는 거에요.
균형감각. 자신을 용서할 줄을 알아야 해요.
저는 가끔 다른 사람들의 몇 가지 점을 이어 좋게 보는 상황에 맞닥드려요. 긍정하기 위한 것이기보단, 남은 정말 좋은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해석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보통은 말이죠. 누구나 자신의 밸렌스를 가지고 있어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적응되거나 소멸되면서 서로 적당한 균형으로 유지되고, 새로이 첨가되는 자극에 아파하거나 즐거워 할 수 밖에 없죠. 음, 지금. 활로가 닫혀져 가고 있네요.
해서는 안 될 이야기, 취해서는 안 될 입장. 과연 그게 무엇일까요? 아.
그래요, 남에게 감정을 구걸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남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먼저는 남이 가진 자율성을 인정해야겠죠. 귀찮아보여도 이건 그가 원한 귀찮음이고, 상관없어 보여도 특정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감정을 전달한다는 것을요. 그게 무리하게, 그리고 자만하게 뭔가를 전부 통제하고 그 책임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3_ 책임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가를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어요.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었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의 지분을 생각해보는 거죠. 개인의 책임이 어느 정도, 집단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다 이런 식으로요. 책임을 뒤집어 말하면 개인이 완전히 노력하고, 집단도 완벽하게 노력하면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 거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개인이 25, 집단이 75 해서 딱 100로 맞춰지는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작든 크든 어떻게 하던 간에 막지 못할 정도의 구멍은 있다고 하는 거죠. 개인이 30, 집단이 50, 그리고 남은 20은 어떻게 해서도 채워지지 않는 거에요.
꼭 개인과 집단만 서로 비교하지 않아도 되요. 애인 사이라거나 친구 사이에서도 이런 일들은 흔하겠죠. 둘 다에게 책임을 나눠주고도 부족한 그런 부분이요. 실수를 용납하는 사회, 보다는 좀 더. 재해를 용납하는 건설사, 보다는 좀 더. 그런데 운이라고 부르든 확률이나 신이라고 부르든, 저 빈 공간을 인정했을 때의 대책이나 메뉴얼을 쉽사리 생각하기 어렵네요. 그런 부분이에요, 자기의 책임 바깥이 전부 남의 책임이 아니고, 남의 책임의 바깥이 전부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 서로 허다하게 싸울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온전하게 서로의 것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4_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시나요? 저도 잘 생각해봤어요. 사실 감정을 표현할 일이 별로 없어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사람 만나는걸 즐겨하는 것도 아니라서, 요즘에는 몇 달 동안 만난 사람이 중복으로 세지 않으면 열 명 남짓 할 꺼라서요. 그리고 감정을 표현할 일 자체가 별로 없잖아요. 감정 표현은 애인들 사이에서나 유일하게 허용된 거 아닌가요? 어떤 쪽으로 길게 나아간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힘들지만 받아들여주는 것이 더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제겐 두 종류의 화폐가 있는 거죠. 사실 감정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없잖아요? 별로 쓰지도 않는 화폐, 규격이 어떻든 무슨 상관일까요. 별로 불편하지도 않은데. 제게는 논리라는, 괜찮은 수준의 통화가 있으니까요. 뭐, 이런 식으로 재수없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추론이 가능하더라구요. 다들 그런 식으로 감정은 대출도 안 해주고 잘 저축해놨다가 가끔 쓰기 좋은 곳에 과소비하는게 아닌가 하구요. 잘 생각해보니까, 제 개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시장의 규칙이 감정에는 훨씬 가혹하게 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겠죠. 감정이라는 장르를.
가끔씩 오글거리는 것은 나쁜게 아니다, 괜찮다라고 옹호하지만 해보라고 하면 할 수 없는게 그런 쪽이에요. 감성적인 것에 왜 그렇게 가혹한가, 그런게 궁금해요. 보통 의사결정에 감정이 끼어들면 사람들이 가혹하게 비판하죠. 어째서 감정은 그만한 가중치를 가질 수 없는 영역이 되었나 싶어요. 누구에게나 논리보다 앞서는 펙터로 감정을 다룰 수 있는 거잖아요. 그만큼의 크기를 인정해야만 전체적인 개인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을텐데. 미움의 크기를 재지 않은지 오래된, 그런 기분입니다.
그래서 요새 인터넷에서 복터진 고양이들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제가 말했던 '어떠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라는 관념이 감정 소비의 지침이 되다 보니 모아놨던 목돈을 쓸만한 곳이 그런 곳들인 거죠.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 선택이 의도되었다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혹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이런 부분의 시장의 왜곡 때문이다, 라고 하면 꼭 이런 상황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았을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런건 아니라는 거죠. 감정을 쓸 수 있는 문턱이 훨씬 높으니까, 지출 유도도 정말 높은 걸로만 끌어낼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음, 큰 단위의 화폐를 결정해 놓았을 이유는 남들에게 비싸게 팔기 위해서일 겁니다. 실제 어떤 가격에 환차익을 보게 될진 모르지만, 어쨌든간에 희소성은 가격을 높여주는 요인 중에 하나니까요. 하지만 좀 틀린 전략이었다고 생각하게 되는군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통화는 그냥 휴짓조각일 뿐이고, 남에게 많이 교환했어도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면서 더 찍어내면 되는 거 잖아요? (말 그대로) 평가 절하당하겠지만.
5_ 지난 번에 이야기하다 문득, 듀게에서 온라인으로 책 읽는 모임을 진행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형식이야 전에 하던대로 하면 될 것 같고... (일단 전에 하던 식이 어떤 식인지를 확인해봐야겠는데..) 근데 막 뭘 해보려거나 이러진 않으려구요. 불씨를 무리하게 키우려다 꺼트린 적이 많아서 하하.
*_ 아 그러고보니. 제목 붙이는 고민을 해결했습니다. 글을 다 쓰고나서 고민하는 거죠. 그다지 해결된 건 아니지만...
2015.12.10 22:39
2015.12.10 23:48
Bigcat_ 달리기 직전, 출발 총성을 기다리는 듯한 열망감이로군요 하하... 할 말이 많다는 건,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두고 말은 못한 게 엄청 많다는 이야기인데, 대단하시네요. 저는 보통 그러면 다 잊어버리거나 짧게 써서 해소시켜버리거나 하거든요. 그런 것들을 계속 쟁여둔 채로 유지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받는데다 구독자들이 글을 읽게 된다고 하면, 다른 의미로 정말 긴장될 것 같습니다. 단거리보다는 오래 달리기에 가까울테니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힘은 날대로 나신 것 같지만.. 휴, 정말 그런 상황 생각도 못할 것 같습니다 하하.
2015.12.11 12:01
2015.12.11 13:17
감정은 내가 갖고 있는 논리/이성을 어디에 적용할 것인지, 논리/이성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그 대상과 범위를 결정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논리에 사용될 전제들)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나에게 소중한 믿음들에는 높은 가중치를 주는 식으로)
그래서 굳이 어떤 사람이 감정 표현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삶에서 무엇에 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가를
보면 그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찾고 싶어하고, 무엇을 지키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죠.
감정 표현이라는 것을 반드시 "나는 기쁘다/슬프다." "나는 네가 좋다/싫다." 같은 단어로 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의 고민에 대해 함께 생각해 주면 그건 그 사람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감정의 표현이겠죠. 누군가가 싫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는 생각과 논리들만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게 되고요. 누군가가 좋으면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자꾸 쳐다볼 테고, 싫으면 눈도 안 마주치겠죠. ^^
그러니까 잔인한오후 님이 아무리 감정 표현을 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이미 생각과 행동과 표정에,
그리고 생각을 표현한 글에 감정은 묻어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그걸 제법 잘 알아낼 거예요. ^^
(물론 잔인한오후 님이 표정과 행동과 글에서 어떤 것에도 관심을 안 보이는, 혹은 가짜 관심을 보이는
기막힌 위장술을 썼다면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읽은 글로는 잔인한오후 님이 감정 표현을 많이 해오신 것 같은데 제가 헛것을 봤나... ( '')??
2015.12.15 18:03
underground_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주까지 원고 마감이라 오늘도 편집장과 전화 통화를 했네요. 그렇게 긴 원고도 아닌데, 진짜 긴장감이 든단 말이죠. 발행 부수가 4만부가 넘는 다는 걸 오늘 알았는데, 그래서 한 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렇습니다.
내가 좋아서 관심있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글 보는 사람도 생각해야 하는구나 하고 새삼 스스로에게 되새기게 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