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교통사고 & 인생은 랜덤

2015.03.17 01:30

헐렁 조회 수:3573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자전거를 타다 저 멀리 앞에 가던 긴머리 아가씨의 앞모습을 확인하려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던 중에..


옆에서 오던 8톤 트럭에 치여서 공중 4회전을 하고 바닥에 내 팽겨 쳐 졌다면...


물론 거짓말이고..


그냥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옆에서 서행으로 튀어나오던 승용차에 박아서 바닥에 넘어졌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옆에서 차가 나오는 걸 보고 저도 브레이크를 밟고 멈췄고 자동차도 멈출 줄 알았는데 안 멈추고 계속 오더라고요.


언덕길이었는데 운전자가 한눈도 팔고 그런 것 같습니다.


암튼 저는 어어~ 하는 사이에 옆으로 차랑 쿵 박고 바닥에 넘어졌습니다.


넘어졌다기보다는 그냥 차에 박고 나가떨어졌다고 해도 될거 같네요.


주변에선 사람들이 절 보고 비명을 질렀으니까요.


저는 태어나서 깁스를 한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학창시절부터 어딘가 깁스에 대한 로망이 있었습니다.  


새하얀 깁스를 하고 학교에 나타나면 친구들이 우르러 몰려들어 제 깁스에다 싸인펜으로 낙서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깁스안쪽 가장 제 눈에 잘 보이는 곳은 빈 공간으로 비워두고 제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다가가서 수줍게 제 깁스와 싸인펜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녀가 거리낌 없이 제 깁스에 남긴 싸인은 다름아닌..


'유신철패, 녹색성장...' 으응?


아무튼 이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면서 '드디어 내 인생 최초의 깁스인건가? 깁스인건가? 깁스인건가? 워우예~' 이러고 바닥에 널부려져 있는데 운전하시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차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주머니는 교회를 다니시는지 '아이고 주님~' 이러면서 나오시던데 저는 또 '아이고 예수님은 주말도 없구나.. 주말에도 호출 ㅠㅜ..' 이런 생각도 하고..


다행히 어디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지만 다리랑 엉덩이가 아프고 불편했습니다.


제 사지의 멀쩡함을 대충 확인하신 차주분께서는 차를 주차하고 다시 온다고 했습니다.


차가 막고 있으면 안되는 길이었거든요.


저는 폰으로 차의 번호판을 찍고 아주머니를 기다렸습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자동차 보험사랑 경찰서에 전화를 했는데 보험사는 주말에는 일을 안한다고 하고 경찰서도 화이트데이에 쉬시는지 전화를 안 받더군요.


아니.. 예수님도 이런 시시한 교통사고 따위에 주말 화이트데이에 강제 소환당하는 마당에 일개 현대다이렉트카 보험 따위가 주말이라고 쉰단 말이냐..

 

경찰은 화이트데이에 급증하는 각종 범죄때문에 바빠서 그런다고 해도 현대다이렉트카가 주말에 쉰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아주머니가 오셨고 결국 보험사랑 연락이 되서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도 찍고 약도 지었습니다.


다행히도 깁스는 커녕 붕대를 감을 일도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의사양반한테 가짜 깁스라도 해주면 안되겠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말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사고가 난지 이틀이 지나고 오늘 보험사에서 전화가 와서 약소하지만 위로금을 입금하겠다고 하네요.


이럴줄 알았으면 목을 움켜잡고 바닥을 구르는 헐리우두 액션을 해야 하지 않았나 후회가 된다면 물론 거짓말이고..


기분이 이상하네요.


그날 자전거를 타기 전에 머리를 잘랐었습니다. 아니. .머리 말고 머리카락..


머리를 자르는 시간이 2초만 빨랐다면 교통사고는 안 났을텐데.. 세븐블럭컷이나 벨튀컷을 했다면 그럼 그날 한 시간을 넘게 병원에서 시간을 보낼 일은 없었을텐데..


어쩌면 앞에 지나가던 긴머리 아가씨의 얼굴을 자전거로 앞질럿ㅓ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으응?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에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어떤 뇌과학자(?)가 나와서 인생은 그냥 엄청난 랜덤이라고 했던게 생각이 나네요.


교통사고도, 직장도, 연애도, 헤어짐도, 그냥 인생이 다 랜덤이래요.


그러니까 이러다 평생 깁스를 못하는 거 아닌가.. 조급해하지 말아야 겠어요.


어차피 랜덤인데.. 언젠가 나의 그녀가 나의 깁스에 싸인을 해줄 날이 올지 모르잖아요..


'절치부심, 천생염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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