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여행에 대한 이야기.

2016.01.03 03:58

쏘딩 조회 수:1078

1.
몇 주 전이긴 하지만, 짧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 역시 아무래도 오늘은 바다를 봐야겠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찰나의 생각이 곧 형태를 갖추어 하나의 동인이 되고, 거기에 순응하는 건 묘한 고양감과 나른함을 줘요. 일단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그 다음은 아무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요.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이후의 파급효과에 대한 걱정은 잠시 어딘가로 날아가고, 오로지 내가 이걸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 남는 거죠. 
학창시절 발도 잘 안 닿을만큼 높은 차고의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일이라던지, 아니면 언젠가의 바낭에서 언급한 여성 분의 번호를 물어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어쨌거나 짐을 싸서 집을 나와 터미널에서 어머니의 카드로 강릉 가는 티켓을 끊는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결심했던 일인 양 자연스럽게 착착 진행되어 그대로 떠나게 됐지요.
카드 결제 SMS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신 어머니로부터 "얘, 어디 가니?" 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아마 바다를 보고 '해냈다!'는 느낌이 들기 전까지 계속 그 상태였을 거에요.



2.
사람마다 저마다의 개성이 있듯 여행을 즐기는 법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저는 우선 국내 여행을 가면 심각한 길치인 주제에 무조건 걸어요. 하루에 20km 이상은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차를 갖고 가거나 렌트를 해도 대부분의 시간을 걷는 데 할애해요.
시가지를 걷든, 해변가를 걷든, 오솔길을 걷든 주위 풍경은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풍경이 예쁘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오직 두 발로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거든요.
지쳐 쓰러질 때쯤에야 겨우 숙소로 돌아와 서너 시간 눈 붙이고 씻고 나가서 또 걷고. 잠시 멈춰서서 나 여행왔다 사진 몇 장 찍고 맛있는 거 검색해서 먹고 또 걷고 걷지요. 

그런데 웃긴 건, 해외로 여행을 가게 되면 그런 비글같은 행동력이 씻은 듯 사라지고 세상에서 가장 나태한 사람이 된다는 거에요.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매장에 방문해서 쇼핑할 때를 제외하면, 보통은 혼자 TV를 크게 틀어놓고 침대에서 뒹굴거리거나 반신욕을 하거나 룸 서비스를 시켜먹거나... 
그것도 지루해지면 수영장엘 가거나 바에 내려가서 술 한 잔 하고 돌아와 다시 뒹굴... 아무튼 호텔이 제공하는 모든 편의를 최대한으로 누리는 고급진 히키코모리가 됩니다. 
물론 대부분이 일행과 함께하는 여행이다보니 이름난 관광지도 가고 로컬 푸드도 먹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긴 하지만, 그런 게 없었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을 거에요. 적어도 지금까지는요.



3.
왜 이렇게 양자 간에 극명하게 차이가 나타나는가 생각해 봤는데, 제 생각에는 '역치'의 문제 같아요. 지금까지 여기저기 다녔던 여행들의 가장 큰 목적은, 쇼핑을 제외하면 인간관계의 일시적 단절에 있거든요. 

'친구'라 부를만한 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관계에 있어 저의 제1원칙은 '내가 이 게임에서 어떤 패를 쥐고 있는가'를 정확히 인지하는 겁니다. 외모나 옷차림, 언변, 제스처같은 것들이요.
썩 좋지는 않아도, 게임 속행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의 똥패는 아니라서 거기에 대해 약간의 주의만 기울인다면, 지금까지는 제가 좋은 감정을 가진 이에게는 높은 확률로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아내곤 했어요.
이제는 그게 숨 쉬고 눈 깜빡이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피로는 누적되기 마련이라 중간 중간 슬레이트를 탁! 쳐서 끊지 않으면 싱크가 안 맞거나 헛돌아버리는 거죠.

그래서 여행을 떠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묘한 생의 실감을 느끼고 위안을 받습니다. 깨어 있는 채로 잠자는 기분을 느끼는 거에요.
다만 그걸 손에 넣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는 쉴틈없이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고, 해외에선 호텔방에서 TV만 켜도, 창문만 열어도 가능하다...의 차이인 거죠. CNN을 봐 CNN을



4.
핵심은 이게 말 그대로 '일시적'인 '단절'이어야 한다는 거에요. 축제처럼 끝이 존재해야 하고, 일상과는 분리된 무언가로 남아야 한다는 거죠.
가령 여행지에서 만나 즐겁게 놀다가 빠빠이한 분이 서울에서 만나자고 한다거나, 배터리 만땅인 채로 돌아왔는데 썸타던 분이 그걸 못 기다리고 남자친구가 생겼다거나...
둘 다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거든요. 말미에 적절한 제목을 가진 적절한 BGM 링크 넣었는데 잘 나오려나 모르겠네요. 썸네일이 좀 야하긴 하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


뭔가 더 쓰고 싶었는데 졸려서 안되겠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섹시한 새해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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