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야기...

2015.05.29 02:30

여은성 조회 수:2085


   그냥 심심한 기분에 한번 써봐요. 


 예전에 토가시가 인터뷰에서 '만화가가 되기로 한 순간 재미있게 영화나 만화를 보는 즐거움은 포기하기로 각오했다'라는 말을 했었죠.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멋있는 말이예요. 하기야, 이미 그는 그가 만든 컨텐츠로 유명해졌으니 어떤 말을 해도 멋있어 보이겠지만요. 흠.


 뭐 저는 저런 각오까지 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창작에 관심을 가진 뒤로는 영화나 소설, 드라마를 보는 걸 복싱하듯이 하게 되었어요. 


 

 

 기본적으로 창작물은 두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봐요. 1-예측할 수 없을 것. 2-가능한 일일 것. 이라는 규칙이죠.


 어떤 사람들은 1번의 규칙에 너무 얽매이면 극이 재미없어진다고 하지만 예측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건은 재미-몰입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봐요. 


 드라마 업계에서는 위의 규칙을 약간 다르게 말한다고 들었어요. '예측은 배신하되 기대는 배신하지 마라'라는 격언으로 말이죠.


 즉 저에게 있어 창작물이라는 건 만드는 사람이 보는 사람에게, 예고한 곳에 정확히 펀치를 적중시키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를 보는 순간 우리는 알 수 있죠. 만든 사람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를 말이죠. 그리고 꼭 창작자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늘 적당히 방어를 하고 있어요. 창작자가 아닌 사람들은 흠 뭐랄까...기대한 만큼 방어한다고 봐요. 아무리 순수히 재미로 가더라도 소문난 영화라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만큼 견고한 방어를 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고 가면 노가드로 영화를 보는 거죠. 기대 안 하고 노가드로 영화를 보다가 꽤 괜찮은 펀치가 들어오면 기분좋게 맞아주면 되니까요.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거장이라도 펀치를 맞기는 싫다는 마음으로 보는 저같은 사람들은 한순간 한순간 놓치지 않고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도 손으로 얼굴을 방어하고 혹시 모를 보디블로에 대비해 배에 힘을 꽉 주죠.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작은 펀치들은 그동안 키운 맷집으로 적당히 버텨가면서 경기를 치뤄요. 결정적인 유효타만큼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1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보는 거죠. 10년 정도 이렇게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니 결국 결정적인 KO펀치는 거의 맞지 않게 되었어요. 수많은 미끼용 잽이나 현란한 페인트모션에도 어지간하면 현혹되지 않게 됐고요.


 물론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순수히 재미있게 즐기지는 못했지만 내가 점점 강해진다는 걸로도 충분히 즐거웠죠. 그게 꼭 창작 실력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수련(?)을 계속 했어요.


 왜냐면 복서들은 이미 한 번 당해본 펀치에는 버티거든요. 이미 한 번 강펀치에 쓰러진 사람을 케이오시키려면 그를 쓰러뜨렸던 그 펀치보다 더 강한 펀치를 날려야 해요. 물론 케이오시키는 방법은 단순히 힘을 길러서 더 강한 펀치를 내미는 것도 있고 펀치를 내미는 타이밍이나 각도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케이오시키는 건 포기하고 좋은 잽을 여러번 날려서 괜찮은 경기를 치르는 복서라는 칭찬을 받는 방법도 있고요. 어쨌든 위에 말한 대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펀치를 맞아본 사람들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계속 복싱하듯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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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엔 기승전결이 없군요. 그냥 그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창작자가 되는 걸 잠깐 포기했었어요. 1년 정도였던 거 같아요. 이건...이솝 우화에 나온 포도를 대하는 여우의 태도 같은 거였어요.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 거야'하면서 가버린 여우 말이죠. 저도 그 여우와 같이 '창작자 따위가 되어봐야 뭘 하겠어? 한달 내내 일하면 DVF 랩드레스 한 벌 사나?'하며 떠나버린 거죠. 


 요즘은 조금씩 창작 관련 일에 손대 보는 중인데 예전처럼 '아주 잘할 수 없다면 시도할 가치도 없다'라는 극단적인 자세보다는 일단 그럭저럭의 창작 노동자가 되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이를 먹으니 폼나게 절벽 끝에 계속 서있는 것보다는 슬슬 앞으로 나오게 되는 거 같아요. 


 휴...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계속 먹으면 왠지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물론 불 대신 다른 게 나올 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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