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햑신 외.

2015.12.08 22:04

잔인한오후 조회 수:1302

1_ 웹툰, 웹툰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니까 하루종일 마음이 두근거렸어요. 무엇을 먼저 말하지, 뭘 어떻게 말하지 하고 여러 생각을 했죠. 요즘 듀나님이 트위터에서 추천 받은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현재 325명째를 이야기하고 있죠. 추천 수는 1491개니까 한참 멀었지만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건 엄청 대단한게 아닐까요. 나도 저렇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을까 싶은데, 그나마 흉내라도 낼 수 있는게 웹툰일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나게 잘 본다거나 많이 봤다거나 하는건 아녜요. 그냥 좋아하는 영역이라는 거죠.


처음에는 햑신에 대해 먼저 이야기할까 했어요. 그런데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카연갤을 먼저 설명해야 하고, 저의 부채감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하고, 그 외의 몇 가지 주요한 요점들을 이야기해야 될꺼란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된다면 처음 시작하는 웹툰 이야기가 차갑고도 무겁게 가라앉을까봐 두려워졌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건 서두에 해야할 이야기니까요. 전혀 그럴 일은 없지만, 제가 서사를 설명하는데 유명한 사람이 되어 첫 인터뷰를 하게 된다면 처음으로 꺼내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니까,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많은 글들 중에 하나를 쓸 때 써도 괜찮겠죠.


일단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요. 자신이 그림을 정말 못 그리고, 두서도 없고, 정말 너무나 미천한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긴 하다면 인터넷에서 어디를 가야할까요? 방황하는 자들은 거대한 네이버 카페에 가입해서 그림을 그릴 수도, 소규모 오에카키 사이트에서 그림을 깍을 수도 있겠지요. 아, 뭔가 전후가 잘 안 맞긴 하지만, 나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하고 누구나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면, 저는 디시인사이드의 카툰갤러리를 떠올릴 겁니다. 통칭 알바라고 불리는 게시판 관리자가 글을 지우긴 하지만, 그만큼 검열이 낮은 곳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꺼에요. 루리웹의 실력향상? 글쎄요, 거기보다 더 낮은 곳일껄요. 나도 못그리고 너도 못그리고,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당연히 예외는 있지만서도) 못 그리는 곳이죠.


햑신은 그런 곳에서 만화를 연재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보통 부정기연재를 하는 만화가들을 보면, 자기 내키는대로 마구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모티브, 어떤 순간, 어떤 감정을 한 장면이나 한 순간에 도달해서 구현시키기 위해 그리는 사람이 있어요. 후자는 마치 시인 같죠. 그런 사람들의 만화를 보다 보면 어떤 돌출된 상황 혹은 어떤 감춰진 순간이 약간 어그러진듯 하게 지나쳐가요. 그건 단순한 개그일 수도 있고, 사무치는 감정일 수도 있고, 매우 미학적인 논리일 수도 있어요. 햑신이란 사람은, 분명히 그런 것처럼 만화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어디에도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그런 만화를 그렸어요. 그런 만화를 보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되죠.


이런 이야기는 매우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그 때의 저는 되는대로 웹툰(과 그 비스무리한 것들)을 되는대로 읽어갔었고 매우 조약한 수준의 만화라도 넘겨 짚어가며 봤었거든요. 내용도 없고 형식도 없는 그런 것까지도 수용하면서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뭔가가 있을꺼라고 생각했죠. 그런 마음은 지금도 그다지 달라지진 않은 것 같아요. 쏟아지는 조약한 아마추어 웹툰들이 거대한 계곡물이라면, 그 아래의 반들거리는 조약돌들이 거기에 숨겨진 무언가와 비슷한 그런 느낌이었죠. 누구나 물장구치며 놀지만 조약돌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런 상황이요.


중요한건 햑신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있어요. 이 사람은 2013년 5월 6일에 자신의 목숨을 끊었어요. 그리고 그 이후 카연갤에도 그의 만화가 올라오지 않고, 이제는 아무도 그를 언급하지 않죠. 너무나 당연한 일이긴 해요.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잊혀지죠. 그리고 기억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처음엔 1년 간격의 꾸준글을 올릴까 했었죠. 하지만 자신을 못 챙길때는 남도 못 챙기더라구요. 여튼 이런 식으로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혹시 제 이야기를 듣고 햑신 만화를 보실 분이라면 실망할 준비를 최대한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 취향은 상당히 독특하니까요.


가장 유명한 연작은 [잔치]지만, [완두콩밭의 파수꾼] 1화를 링크합니다. [완두콩밭의 파수꾼 - 1화]

단편을 원하시는 분을 위한 [날 보러 뭐 어떡하라고]. 가장 수작이라거나 그런 느낌으로 고른 것은 아닙니다.


2_ 가장 먼저 소개해볼까 했던 작가는 [반바지.]라고 루리웹에서 SF 단편 만화를 연재하는 분이었습니다. 백문이 불어일견. 한 편 보고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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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희야, 정말 미안해]



3_ 후, 진이 다 빠져서 다른 설명을 따로 하긴 어렵네요.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어제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를 완독했습니다. 소위 NL이라 불리우는 조직의 흐름을 건조하게 서술한 책인데 꽤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달까요. 도대체 왜 진보연하려면 반미가 꼭 첨가되는가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되었습니다. 또한, 과거 5.18 관련 미술작품들을 보러 갔을 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반미적인 서사가 작품에 첨가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죠. 미국이 개입을 했다면 5.18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참 생소하였습니다. 기묘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참 모 아니면 도인 것인가 싶은. PD 이야기도 어디 그렇게 나온 책이 없으려나 싶습니다. (그리고 NL이 뉴라이트로 전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런 메커니즘이나 사건 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더군요) 잠깐 느낀거지만 NL은 감정만 다룰줄 아는, PD는 감정을 다룰줄 모르는 양극으로 보였습니다. 후자는 모르겠으나 전자는 그 끝이 종교더군요.


다른 한 켠으로는 NL의 조직 유지 방식이 놀랍게도 범대학 기독교 동아리의 조직 유지 방식과 흡사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가지 갈등들도 그렇구요. 대학을 기반으로 하고, 자신의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사람들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구조를 유지하는 방식이.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진보운동가들의 모임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종교 동아리들도 쪼그라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대학을 나오기 직전, 거의 대부분의 취미 동아리들은 사멸이나 사멸 직전에 있었고, 취직이나 어학을 위한 동아리들이 매우 흥행하고 있었죠.


최근의 학교에 계파가 생긴다면 회사의 연장선상에서나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싶더랍니다. 먹고 살기에 가장 큰 공포를 가지는 현재,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그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동체들이 해체된 후의 개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을지. 하기야 저 말고는 다들 과장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평상처럼 해결해나가는 기분이 있습니다만. '사실 별 일 일어나고 있는게 아니잖아' 싶은.


4_ 그런 걸 생각해봤습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폐의 규격에 따라 교류가 달라지는게 아닐까 싶은 것이요. 예를 들어, 누구나 발행할 수 있는 화폐의 총량은 있습니다. 마음이 넓든 좁든 인간마다 그 한계가 있는 법이죠. 그런데 그 화폐를 얼마로 쪼개서 발권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마다 환율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외환 시장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겁니다. 두루뭉실한 설명은 끝내고 적용으로 들어가보죠.


저는 제가 가진 감정을 딱 천만원 규격으로 3매를 찍어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진중하고, 무언가 좋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주 맘에 들었을 때, 마치 그 사람이 내 인생에 한 번 밖에 없을 인연일 때, 혹은 철천지 원수일 때나 상대에게 그 감정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1엔까지 발행하는, 사소한 일부터 아주 거대한 일까지 적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파는 사람에게는 매번 당하고 있다가, 어떤 선이 넘어섰을 때나 10,000,000원을 줄 수 있겠죠. 이건 전적으로 발행규격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미세한 수준의 감정을 흔하게 주고 받습니다. 마치 컵에 부어진 물입자처럼, 끊임없이 교류를 하면서도 총량을 맞추고 있죠. 경계선이 안 보일 정도로 잘 녹아드는 겁니다. 그런건, 작은 수준으로 감정을 잘라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화폐로 이야기하니까 판매와 구매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의 감정은 증여의 형태이니 주고 받는다고 생각하는게 좋겠죠. 이런 문제는 도대체 왜 생기는 걸까요? 사실 감정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서로의 온도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전도율이 낮으면 서로 간에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정보일 뿐일테니까요.


좀 더 작은 단위의 화폐를 발행하는 법. 그게 제가 배워야 할 일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감정을 가볍게 주고 받는 것 말이죠.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터부시 되어 왔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건 감정의 잘못이라기보단, 그 이후의 개개인의 비윤리적 행동에 따른 선제적 방침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말이죠.


5_ 휑하네요.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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