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2015.12.06 13:35

로치 조회 수:2607

한창 인터넷이 고아라 남편찾기에 열을 올릴 때, 저는 응답하라 1994를 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오마쥬라고 변명을 대도, 터치부터 크로스게임까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으로 도배가 된 아류물을, 아다치 옹의 모든 만화를 소장하는 것이 목표인 자로서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입니까? 모든 인터넷 게시판마다 이우정 카피캣, 이우정 카피캣, 이우정 카피캣...... 한 없이 찌질해 보일 지언정 마구마구 악플을 달고 다녔지요. 다크사이드에 사로잡힌 덕심은 그만 기혈이 뒤틀려, 그녀가 참여한 예능과 마봉춘 예능의 유사성을 써재끼는 등!!! 저는 기꺼이 한 마리의 시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포스따윈 개나 줘 버려...


그리고 어제 저는, 변절했습니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선일체를 지향하는 변절이 아니요, 한 떨기 꽃같은 미치코를 향한 연정에서 비롯된 사랑과 눈물의 도피입니다. 나는 맹세코 조국을 배신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소. 만일 선구자께서 이 몸의 죄를 단죄하신다면, 그것은 아가 작금에 이르러 조국을 애모함과 같이 저 한 알의 사과와도 같은 소녀를 마음속 깊숙한 곳에 심었기 때문이외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의 클립을 보며 저는 외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구매버튼을 누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어쩌다 아이돌의 행각을 보기 위해 지갑을 열다니..... 아아.. 부르다 내가 죽을 그 이름. 덕선아아아아아!!!!


어제 덕선이와 택이가 해 저무는 해변에서 정답게 노는 모습을 보니, 저 좋은 시절에 시내 한 번 나갈줄을 모르고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던 제 십대가 한심하고, 또 불쌍했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있었지요. 짧은 (진짜)여름방학이 끝나고 보충수업이 시작되던 날, 까맣게 그을린 채 나타나 저희들끼리 찍은 사진을 돌려보며 막 시작한 연애에 설레어하던 친구들. 이리저리 떼지어 몰려 다니며 이야기거리를 만든 친구들. 그 시각에 난 뭘 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기껏 한다는 짓이 씨디를 사 모으고, 방구석에 박혀서 소설책이나 사 읽는 게 고작이었더라고요. 따져보면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책상에만 앉아있고. 


만화 "열 네 살" 에 보면 어쩐 일인지 십대로 돌아간 위기의 중년이 나오지요.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면서 깜짝 놀랄 정도로 가벼운 몸에 감탄하고, 바이어를 상대하며 익힌 영어로 높은 점수를 얻습니다. 그리운 시간 속에 살아있는 그리운 사람과 화해하고, 잊었던 풋풋한 마음과 재회하지요. 리부트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신 버젼의 소프트웨어가 구형 하드웨어를 한탄하며 발생하는 현상인데, 아 그런 건 됐고, 만약 "언니가 간다??" 속의 고소영처럼 타임슬립하여 십대의 저를 만난다면 딱 한 마디만 해주고 싶어요. "야, 좀 나가서 놀아."




동시대에 부까지 쥐고 있던 이웃 왜나라에선 이런 작품이. 때는 당분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일본 경제, 문화의 황금기. 골목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정봉이 형네 식구가 어머니 생일 날에나 돈까스를 썰던 시각, 왜국의 고딩들은 용돈으로 카페며, 패밀리 레스토랑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듭니다. 슬램덩크 북산고 애들이 도내 제일이 되겠다며 코트에서 에네르기파 쏠 때, 진짜로 세계를 재패하고 돌아온 택이가 쏜 게 동네 피자. 쟤들은 그냥 막 사먹습니다. 막 사먹어요. 이야, 바둑의 신이고 나발이고 사회 전체의 부가 최고구나. 


극장판에 의하면 운 좋은 놈 쿄스케와, 뭐가 아쉬워서 쿄스케 같은 한량자식과 엮이는지 모르겠는 마도카가 나란히 대학에 입학하는 걸로 해피엔딩을 맞이 하는데, 과연 그게 해피엔딩일까요? 작가의 설정상 그들이 대학 졸업장을 받아드는 그 때, 마침내 쪼그라들 줄 몰랐던 일본의 거품은 파바박 꺼지기 시작하고, 작금 우리가 보기엔 애교수준이지만, 지들은 또 지들 나름대로 지옥으로 이어진 하이웨이에 들어서게 됩니다. 


...


... 타임슬립해도 그냥 공부나 더 하라고 해야겠다. 아무래도.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0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6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13
107664 [바낭] 케이팝스타 마지막회 짤막한 잡담 [8] 로이배티 2013.04.07 3649
107663 지하철에서 이어폰도 꽂지 않은채 XXX를 봤다던 용자에 관해서 [6] chobo 2012.06.07 3649
107662 '짝'에서 제일 우울한 장면 [4] 루비 2011.12.28 3649
107661 이배우 인물이 좋은데 어디 나오나요 [9] 가끔영화 2012.07.23 3649
107660 [광고 유감] 제발 그냥 사달라고 말해!! [19] 닥터슬럼프 2011.09.18 3649
107659 떡볶이를 너무 좋아해요. [30] 옥이 2012.09.27 3649
107658 윤종신 '단정 짓지 말고 나를 지켜봐 달라' [3] 자본주의의돼지 2010.12.11 3649
107657 11월 21일 .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린 잠실운동장 [8] 단 하나 2010.11.22 3649
107656 언제부터 전주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 했을까요 [16] zaru 2010.08.13 3649
107655 민주당에서 탤런트 최종원씨를 공천했네요 [6] zivilrecht 2010.07.02 3649
107654 전주분들, 전주 한정식 맛난 곳 좀 소개해주세요. [3] 늦달 2010.06.08 3649
107653 미야자키 하야오 신작 바람 불다 메인 예고편 [13] 서브플롯 2013.07.20 3648
107652 터키식 커피 처음 마시고 소감을 써보겠습니다 [14] loving_rabbit 2013.02.25 3648
107651 말좀 잘한다는 소리 듣는 속칭 젊은 보수들에 대한 대처법 [8] soboo 2012.12.26 3648
107650 겨울옷 색들은 어떠신가요? [19] 씁쓸익명 2012.10.31 3648
107649 [기사] 미혼 남성 '야동' 보면 간 기능 손상 [13] 화려한해리포터™ 2012.04.16 3648
107648 직업군의 클리셰적인 말 [17] Any Love 2011.12.03 3648
107647 오늘 무도 보자마자 느낀 점 [3] eoehr 2011.11.12 3648
107646 애플 vs 삼성 재밌게 돌아가네요. [8] 자본주의의돼지 2011.09.26 3648
107645 [질문] 비틀즈의 hey Jude 가사 [2] 시소타기 2012.08.03 364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