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저씨는 죽어야 한다.

2015.12.29 22:23

그런마음 조회 수:5513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

아저씨(명사.)
•부모님 세대의 남성 친척을 칭하는 말. 아버지의 남자 형제는 제외함.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을 칭하는 말.
•모르는 성인 남성을 칭하는 말.
•한국의 잘생긴 배우 원빈이 주연한 2010년 영화 제목.
•개새끼처럼 행동하는 중, 장년층 남성 (동의어: 개저씨)

만일 당신이 상당히 이런 부류의 인간이라면, 이걸 이겨보시죠.

당신은 동료 세명과 직장 근처에 있는 중식당을 갔습니다. 꽤나 고전적인 메뉴-짜장면, 매운 짬뽕, 볶음밥 그리고 함께 먹을 수 있는 탕수육-을 주문했죠. 탕수육이 먼저 나왔고, 탕수육을 찍어먹을 수 있는 작은 간장종지 두개도 나왔습니다. 당신은 간장종지를 두개 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냐면 당신 일행이 네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웨이터는 거절했습니다. 식당 규칙이 손님 두 명당 간장종지가 하나라면서요. 당신은 식당의 더러운 불의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고, 이 식당을 나치 수용소 아우슈비츠의 간수와 같다고 비난하고, 당신의 상처받은 마음에 대하여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신문사에 칼럼을 게재합니다. 이 칼럼에서 당신은 사람들에게 이 식당에 대해 불매운동하기를 권하며 그 근처 중식당 네 곳 중 세 곳의 이름을 밝히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 식당의 이름을 폭로합니다. (세 곳의 이름이 밝혀졌기 때문에) 나머지 하나가 간장종지를 추가로 주지 않는 식당이 되겠지요.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설 기사 “간장종지 두개”는 저번달 말 조선일보 주말판에 조선일보 기자의 이름으로 실렸습니다. 그리고 며칠동안 전국적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죠. 기자들은 이 기사를 쓴 기자를 비난했습니다.-조선일보 사설 부장도요-그리고 심지어 조선일보의 보수적인 독자들조차도 이 비난의 대열에 합류하여, 간장에 대한 중식당에 대한 공개적인 망신주기는 ‘갑질’의 예시가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갑질이란, 사회에서 힘있는 사회 구성원이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 것을 지칭합니다.)

갑질은 물론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일년 전 JFK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탑승했던 조현아 전 부사장의 유명한 “땅콩 회항”이 그 예입니다. (당시 엄청난 양으로 쏟아져나오던 국제적인 보도들을 생각해보면, 아마 우주에서 비행하던 우주인만이 이 이야기를 모를 것 같네요.)

하지만 이 이야기속에서 조선일보 기자가 성질이 난 것은 제게는 거의 대수롭지 않은 일에 가까웠는데요, 왜냐하면 저는 많은 한국 “아저씨”들이 후에 창피한 일을 당하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성을 잃어버리는 광경을 너무나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개저씨입니다-한국의 나이든 남자로-만 35세 이상이라고 합시다- 불가해한 이유로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며, 자신(혹은 남성 전체를) 우주의 중심에 두기 위한 이상하고 잘못된 질서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자신보다 하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앞에서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 이러한 종류의 남성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기괴할 정도로 확신을 하며, 이들이 거부당하거나 이들에게 맞서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극심하게 당황하고, 심지어는 화를 낸다는 점입니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서 이런 “아저씨”가 화를 내는 빈도수는 너무나도 높기 때문에, 내 친구들을 포함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한국의 중,장년층 남성 다수를 부를 때 좀 더 존경심을 뺀 별칭에 의존합니다. 즉,“개저씨”라고 부릅니다.

개저씨라는 말은 주로 중년의 남성을 부르는 “아저씨”와 한국말로 개(…)를 뜻하는 접두사를 혼합하여 만든 용어입니다. 저는 수년간 이런 개저씨들을 참아왔습니다 - 컨퍼런스가 있기 전까지는 저와 모르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대학원 입학용 영어 에세이를 공짜로(…) 써 줄 것을 요구하느라 저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한국의 3대 신문사를 다니는 중견 기자(제가 모든 연락수단을 차단하기 전까지 그 사람이 저한테 얼마나 많이 연락을 해댔는지 떠올려봅니다.), 저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는 양 굴며 자기 연구실 책상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저를 거의 하루종일 부려먹는 조교로 쓰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오던 교수 (친절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전 이미 제 책상이 있었어요. 집에요.), 제가 렌트할 아파트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한 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속이고, 이후 제가 그의 사기행위에 대한 일을 가져오자 이 모든것을 딱 잘라서 부인하던 부동산중개업자.

그리고 지하철 칸 내에서 자기가 맥주집에 있는 것마냥 소리를 질러대던 술 취한 주정뱅이들, 제가 일본인 관광객처럼 보였기 때문에 길을 돌아서 가려고 했던 택시 운전기사, 마지막으로는 진짜로 음식점 웨이터들이 중세시대의 하인들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이는 음식점 손님들. 그들은 이렇게 고함칩니다. “언니! 지금 소주 두 병 더 가져와! 당장!”

(당신이 한국 남성을 만나야만 한다면,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주의깊게 살피십시오. 만일 그 사람이 당신과 친하고 격조없는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도중에 당신에게 계속해서 정중하게 말을 건네는 것을 제대로 못한다면, 이는 그 사람이 개저씨일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왜 남자만 이럴까요? 또 왜 특정 연령대만 이럴까요? 박수찬 만화가(*장도리 만화가)는 왜 그의 사회 정치적 요소가 담긴 작품들에서 여성을 남성만큼 많이 등장시키지 않느냐는 질문에 “여전히 (여성보다는) 더 많은 남성이 물의를 일으키니까요.”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에서 다양하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너무나 많은 잘못된 일들의 주범은 중견 남성입니다. 그리고 악의 사슬 속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남성들은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습니다- 남성이 나이가 더 많이 들수록, 이 남성은 더 많은 관용을 받습니다. 이들이 다시 무례해질 수 있도록 사회적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죠.

여당인 새누리당의 김무성 당 대표가 그 예입니다. 김무성은 자신의 무수한 폄훼발언으로 온라인상에서 개저씨로 비난받습니다. 특히 막말로 유명한데요, 김무성은 최근 있었던 자선 행사에서 아프리카 출신의 교환학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니 얼굴은 연탄색과 똑같다”고 발언했습니다. 이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국가적으로 창피한 일이라고 비난당하자, (그리고 당일 네이버 포탈의 검색어 1위로 오르자) 김무성은 소위 “사과문”을 올림으로서 심지어 더 커다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제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저는 그냥 친근하게 대하려 했을 뿐입니다.”아저씨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식상하게 나타나는 특징 두 가지는 둔감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모욕하며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김무성은 자신의 정치 인생에 확실한 데미지를 입지도 않았는데, 이는 경향신문이 말하는 김무성의 “거칠고 마초같은 이미지” 덕분입니다. 김무성의 주 지지층은-그와 비슷한 나이먹은 사람들인데-“남자는 남자다워야”라는 믿음을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진짜 남자는 개저씨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최근까지도 개저씨가 되는 것은 한국의 남자아이들에게 피할수도 없고 예외도 없는 운명으로 보였습니다. 남자아이들은 단지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괄목할만한 성취로 인하여 그 부모에 의해 애지중지받으며 지나칠 정도로 방임되었고, 폭력적인 군대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야만적인 힘을 찬양하는 마초적인 문화에 세뇌되며,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견디도록 몰아붙여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결혼과 부모가 되는것과 이후에 나이가 드는 것은 남성에게 - 그리고 일정부분 여성에게도- 삶에서 공동체를 좀 더 신경쓰지 않는 방식의(이기적인) 사고를 배우도록 하고, 더 가족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거의 모르는 인간이 되도록 허락해줍니다. “하지만 나는 먹여살려야 할 아내와 애들이 있어”는 주로 한국 법원에서 대중이나 판사에게 동정심을 호소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말로, 마치 가족의 생계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요인처럼 보이도록 말하는 겁니다. 이는 “정상참작”이라고 불립니다. 한국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보다도 자신과 자기 가족을 가장 중요한 첫번째 책임감으로 생각하는 개저씨를 용납할 뿐만 아니라 개저씨 짓을 하도록 고무시킵니다. 만일 당신이 아버지라면, 사회는 당신이 개저씨가 되는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비난받아 마땅한 본성은 단지 당신의 건강한 부성의 증거가 되고 당신의 헌신은 가부장제를 지킬수 있는 도덕적 의무가 됩니다.

마초 개새끼 숭배와 부성 숭배가 나이 숭배사상과 맞물렸을 때, 한국은 이를 오랫동안 “벼슬”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벼슬이란 귀족적 지위와 특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벼슬로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앞에서 왕이 되버리는데요, 심지어는 나이든 사람이 지적 결함이 있든 도덕적 문제가 심각하든지와는 상관 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개저씨들과 이성적인 토론을 지속해보려고 해보세요. 당신의 논리로는“머리도 피도 안 마른게 감히”에 자주 의존하는 그 남자들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너는 나랑 비교했을때는 갓난애기에 불과해. 그러니까 입 닥쳐.”

개저씨 옹호론자들이 나이든 세대가 한국 발전기에 겪었던 역경들에 대하여 자꾸 이야기를 꺼낸다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정중함을 가르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니가 평등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니가 풍족하고 운이 좋기 때문이야.”그리고 이들은 개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이 나이든 남자뿐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줌마를 봐!” -아줌마란, 중년의 한국 여성을 지칭하는 말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팔꿈치로 찌르고, 밀고, 요구하고, 시끄럽게 굴며, 대부분의 경우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글쎄요, 한국은 이제 더이상 가난하지도 않고 더이상 전쟁으로 파괴댄 국가도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지속되기만 하는 한국전쟁이 있긴 하지만요.) 따라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들에 대하여 개인 행동의 책임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터무니없는 행동들을 저질러도 다른 남성들보다는 더 마초적인 이미지라는 보상을 받는 개저씨와는 달리 아줌마는 단순히 아줌마라는 이유로 고통받습니다. 아줌마는 더이상 여성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이 강해진다는 것은 여성성을 잃는 것이라는 한국에서의 젠더 개념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줌마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례하게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이미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남성의 영역에서, 이들은 전혀 섹시하지 않은 생명체로 보입니다. 이들의 실용적이고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헤어스타일만큼이나 말입니다. 한국에서 아줌마들은 섹슈얼리티가 전혀 없는,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인 사람이 됩니다.

한국은 이런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힘겹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다른 세계관’이란, 한 사람의 부성, 나이, 성별, 그리고 혼인유무상태가 그를 인정해주고 특권을 주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능력이나 도덕적 인성이 아닌, 나이나 성별이나 혼인유무상태라는 피상적인 특징이 자신을 존중해주어야 할 이유로 사용됩니다. 이는 개저씨들이 자기 자신을 일반적인 남성, 남성중의 남성, 남성성의 귀감이라고 정의하며, 이 정의를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조부 세대나 부모님 세대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은 젊은 청년층들은 이러한 기존 시스템을 “유교 탈레반”이라고 이름붙였는데요, 이 “유교 탈레반”에 대한 반발은 피할수도 없고 대체적으로 예상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을 “헬”이라고 부르는 대중의 비판이라는 여파로 나타났습니다.
불평등과 부패에 비하여, 이 사회에서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나이든 남성의 사고방식은 비합리(비-함니)적이고 후진적으로(미개) 표현됩니다. 이 남성들은 간장종지 좀 덜 줬다고 자신의 분노를 신문 페이지를 할애하며 쏟아내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인종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며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입에 올림으로써 청년층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즐겁게 해주고, 궁극적으로는 절망하게 만듭니다. 이 청년층은 자신이 태어난 국가와, 자신들의 곤혹스러운 윗세대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암울함을 느낍니다.

모든 아저씨가 개새끼는 아니지만 너무 많은 아저씨가 개저씨처럼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저씨의 시대는 그 끝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개저씨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하나의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가 됩니다. 알콜중독자를 치료하는 전통적인 처방처럼 말이죠- 일단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치료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진보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개저씨들을 필사적으로 없애야 합니다.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 구세웅 스탠포드 박사 글을 번역했음.
원문 링크는 여기: http://www.koreaexpose.com/in-depth/gaejeossi-must-die/

*필자 구세웅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스탠포드, 예일, 그리고 이화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글은 뉴욕타임즈, Foriegn Policy, 그리고 Inside Higher Ed에 실렸습니다.



출처:http://m.blog.naver.com/saso5509/220579772085


예전에 듀게에서 개저씨 논쟁이 있었던 게 생각나 가져와봤습니다ㅎ
이 글의 개그포인트는 원문이 영어라는거...gaejeossi-must-die

애인이랑 둘이서 빵 터져서 한참을 깔깔거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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