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5 11:06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읽고 있어요.
유명한 철학자의 유명한 책이고 내용이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다 양도 많지 않네요. (250페이지 정도예요.)
그런 책을 왜 이제까지 읽지 않았나 생각해 보니 아마도 '정복'이란 말이 맘에 안 들었나 봐요. ^^
(뭘 정복씩이나 한단 말인가, 정복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삐딱한 마음??)
어쩌면 행'복'의 정'복'이라는 '복'자 돌림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왜 어감 안 좋게 '복'이 두 번이나 나온단 말인가!!)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참 좋은 소설이나 영화를 뒤늦게 봤을 때 저는 이제까지 제가 소설이나 영화를 열심히 봐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쁘더군요. 앞으로도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소설과 영화를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을 테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뭐 이런 게으른 자의 부유함을 느끼면서요. ^^
그런데 이 책은 어렸을 때 읽었으면 사는 게 훨씬 수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의 전반부는 불행의 원인에 관한 글이고, 후반부는 행복의 원인에 관한 글인데 전반부 첫 장의 제목이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이에요. 아마 러셀은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을 불행의 시작으로 본 것 같아요.
"내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다.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또한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결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랬으니 나 자신을
불행한 괴짜로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차차 자신과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법을
배워나갔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외부적인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그 나름대로 고통을 부를 수 있다. 세상이 전쟁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친구들이 죽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고통은
자신에 대한 혐오로 생기는 고통과는 달리 삶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파괴하지는 않는다. 외부에 대한 관심은
어떤 활동을 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관심이 살아있는 한 사람은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기껏해야 일기 쓰기에 매달린다거나,
정신분석을 받으러 정신과에 다닌다거나, 승려가 되거나 할 뿐이다. 하지만 승려가 된 사람도 규칙적인 수도 생활에
쫓겨 자신의 영혼을 잊을 수 있어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승려가 종교에 귀의한 덕분에 누리고 있다고 믿는
행복은, 그가 어쩔 수 없어서 도로 청소원이 되었더라도 누릴 수 있었던 행복에 불과하다.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바람에 불행해진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적인 훈련뿐이다."
(<행복의 정복>, 이순희 옮김, 사회평론, pp. 17~18)
자기성찰 같은 것을 미덕으로 내세울 법한 철학자가 이런 얘기를 하니 재밌지 않나요??
돌아보니 일기쓰기를 열심히 하던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같아요.
물론 일기쓰기를 해서 괴로웠던 게 아니라 괴로워서 일기를 썼던 것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일기쓰기만 해서는 제 자신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것도 없었고 괴로움이 덜해지지도 않았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말들이 돌고 도는 걸 지켜보았어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눈으로 제 마음 속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뭐 대단한 발견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고
제 자신에 대해 더 정확히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죠. 그걸 깨달은 순간 일기쓰기를 때려치웠고요.
그후 가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해 보려고 책을 읽고 공부하다 보면 제 자신에 대해 알게 될 때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게 되면서 나도 그런 부분을 나도 모르게 갖고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내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기더라고요.
보통은 거꾸로잖아요. 내가 어떤 성향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이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죠. (내 자신에 대한 이해 =>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그런데 가끔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될 때가 있어요. 이해가 잘 안 되는 다른 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저의 어떤 성향이나 행동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도 하게 돼요.
(헉, 내가 이런 사람이었어?? 하는 깨달음이 가끔 있었어요. 뭔지 안 알랴줌. ^^)
보통 나를 사랑해야 다른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게 된다고 하고 그 말도 맞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일방향은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저런 결점이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애쓰다 보면, 문득 내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던 부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의 성향이나 행동들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나를 좀 더 사랑하게 되는
그런 반대 방향으로의 이해도 생기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 내 자신에 대한 이해)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상 제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미 이해해 주고 있는
그런 성향과 행동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보며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사실상 제 자신에 대해서도
(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어도) 이해를 못 해주고 있는,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들이었죠. 그런 부분들은 쉽게
의식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제 눈엔 제가 아는 것만 커다랗게 보이는 것처럼요.)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를 해 보려고 책도 찾아보고 공부를 하다보면 그제서야 보이는 거죠.
나에게도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이, 내가 왜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들을 했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만큼 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현재 나는 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만큼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해 보려고 내 자신을 자꾸 들여다 본다고 해도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이해해 보고 사랑해 보려는 노력을 통해서, 그제서야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내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간단히 소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가 뭔가 도 닦는 얘기가 나와버렸네요. ^^
여기서 얘기한 건 뭐 저의 가설이고요. 이게 잘 들어맞는지 안 맞는지는 살면서 검증해 봐야겠죠. ^^
2015.12.05 12:09
2015.12.05 12:19
사람은 자기 자신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건 어쩔수 없는거죠,그 범위 안에서 노력해야겠습니다.
또 나이 들어가면서 어쩔수 없이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좀 편하고(결점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승녀(승려인가)의 포만감이나 청소부의 그것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2015.12.05 12:35
2015.12.05 14:05
저는 제 자신에 관한 얘기, 이런 도 닦는 얘기를 하고 나면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숨어있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대댓글도 열심히 안 달게 되고 그래요. ^^ (그래도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어요. ^^)
젊은익명의슬픔 님은 그동안 고민 많이 하셨으니까 이 책에서 뭔가 더 얻어내실 수 있을 거예요.
책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통해 조언을 얻으면서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겠죠.
이 책이 도움이 안 되면 다른 책도 읽어보세요. ^^
가끔영화 님은 이미 생활 속에서 도를 닦고 계시는 것 같으니 우리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아요. ^^
2015.12.05 18:27
와, 마침 언급하신 책을 구입만 해놓고 차일피일 미뤄두면서 안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 쓰신 글 보니까 빠른 시일 내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막 드네요. 좋은 서평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12.05 19:31
저는 책을 많이 안 읽는 사람이라 일확천금의 마인드로 책을 고르는데요.
(1권으로 100권의 값어치를 하는 책을 읽겠다 뭐 그런 마인드죠. ^^)
이 책을 읽으면서 역시 시간의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고전은 일당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훌륭한 철학자가 대중을 위해 쓴 멋진 자기계발서예요. ^^
2015.12.05 21:25
제 식대로(?) 공감이 가는 얘기군요.
전 자신을 사랑하라 류의 얘기들이 싫거든요.
자신을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이는 거고 그래서 힘든 건데 거기다 대고 자신을 더 사랑하라니.
그냥 자기 생겨먹은 데는 신경 좀 끄고 밖으로 눈을 돌리면 좋을텐데.
좀 더 원시적이고 직접적으로 말예요.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좋아하는 음악이라든가.
내가 이 음식/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로 자신을 포장할 생각 따위 하지 말고, 그냥 뇌가 느끼는대로.
2015.12.05 22:28
이 책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 결국에는 자신이 열정을 바치는 대상이 늘 변함없다는 것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권태에 시달리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예전의 제 모습을 돌아보면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맨날 분석하고 비판하고 들들 볶아도 제 자신이 별로 변하는 게 없으니 제 삶도 변화가 없고
그냥 사는 게 괴롭고 재미가 없더라고요. ^^ 쉽게 변하지 못하는 제 자신은 그냥 좀 내버려 두고
주위에 널려있는 것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취미 생활이든 공부든 어떤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마음을 쏟았다면 사는 게 훨씬 재밌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 청춘을 돌려다오~~ ㅠㅠ)
2015.12.06 00:14
2015.12.06 01:01
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제목부터 제 취향이군요. ^^ 게으른 저를 위해 다시 한번
러셀 경께서 한 말씀 해주시려나요?? <인생은 뜨겁게>는 한국어 제목인 것 같긴 하지만
내용과 무관하게 맘대로 붙이진 않았을 테니 아마 인생을 뜨겁게 살라고 말씀하셨나 봐요.
이 분의 자서전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네요. 출판사 광고는 '가슴 뛰는 삶을 꿈꾸는 청춘을
위한 인생 교과서'라는데... ^^ 청춘은 아니지만 가슴 뛰는 삶을 꿈꾸니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2015.12.06 09:51
버트란트 러셀이 참 바둑 두듯이 글을 쓴다고 해야하나요, 정말 정갈하게 글을 쓰죠. 100년전 사람인데도 그 격차가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요. 공로가 많이 있었겠지만, 글을 이해하기 쉽게 쓰는 것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흔히 말하는 비문학계열에서.)
행복의 정복은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읽은지 오래되서 그 여운만 남아있고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이 기회에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한 번 더 읽어볼까 싶군요.
2015.12.06 11:28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읽었을 텐데... 골치 아픈 철학책인 줄 알았죠.
철학자인 러셀이 노벨문학상을 받다니 새삼 신기하네요. 다른 철학자들도 노벨상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주고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읽기 쉬운 책들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잔인한오후 님과 다른 듀게분들도 그런 책들 알고 계시면 많이 소개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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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도 닦는 얘기에 댓글 달리기 힘들 것 같아 노래 친구를 불렀어요. ^^
Harry Nilsson -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