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디씨 야갤(국내 야구 갤러리. 야옹이 갤러리 아님ㅎ) 눈팅을 하는데, 그곳에서 '아 몰랑'이라는 유행어는 여혐적인 맥락으로 곧잘 쓰입니다. 그래서 좀 불편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아 몰랑이라는 단어를 보면...





지금이야 거의 안 쓰는 단어인데, 예전에 '빠순이'니 '빠돌이'니 하는 단어가 많이 쓰였죠.



00년대 초반에 많이 쓰인 단어인데, 저때의 인터넷 문화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에 하나가 '무뇌충'이었죠. 문희준을 비하하는 단어 말입니다. '빠순이'라는 단어도 어느 정도는 문희준을 까던 당시의 유행에 편승해서 퍼진 단어일 겁니다.



'감히 아이돌 그룹 출신 주제에 진짜 음악인 락을 건드리는 주제 모르는 문희준'에 대해서 (사실 락이든 뭐든 간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대다수의 군중들이 증오를 퍼붓던 그 시절에, '빠순이'라는 단어는 '진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쫓아가는 어리석고 멍청한 여자' 뭐 이런 의미로 쓰였죠. 선민 의식 + 남성우월주의 + '아 몰랑 문희준 음악 들어본 적은 없지만 후지다잖아' 이런 식의 익명이기 때문에 향유할 수 있는 무책임한 증오 분출이 합쳐져서 만든 단어인 거죠.



생각해 보면 빠돌이라는 단어는 아예 말이 안 됩니다. 남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방을 오빠라고 부르진 않을 테니까요. 저 빠돌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공격하려는 대상에게서 남성성을 거세하려는 흔적이 담긴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문희준을 좋아하는 남자 팬을 '문희준 빠돌이'라고 하면 '문희준을 좋아한다고? 넌 빠순이랑 다를 게 없어. 넌 남자도 아니야 이 새끼야' 뭐 이런 비하의 의미가 담긴 거죠.




근데 재밌는 게 어떤 시점을 시작으로 해서 '빠순이'니 '빠돌이'니 하는 표현이, 긍정적인 맥락 속에서 쓰인다고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맥락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어떤 시점인가부터 해서 걍 저 '빠'라는 표현을 자신의 기호를 나타내는 데 쓰기 시작한 겁니다. '난 아이작 아시모프 빠돌이야' 이런 식으로요. 06~07년도에 디씨 갤러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기 자신을 ~~빠라고 지칭할 뿐만 아니라 아예 닉네임을 ~~빠 이런 식으로 짓는 경우도 흔했죠.




오타쿠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타쿠야 원래 있던 표현이라지만, 우리나라에서 '오덕후'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 건 06~07년도 쯤이죠. 문희준이 군 입대를 하면서 마녀사냥의 덫에서 풀려나고 '보살'이라는 별칭까지 얻는 희안한 일이 일어난 뒤에(애초에 음악 때문에 깐 거 아녔나요? 그 많던 안티들은 다 어디 갔죠?), 바통 터치를 하듯이 그 자리를 '오타쿠'라는 뭐 가상의 존재가 대체했죠. 제가 가상의 존재라는 표현을 쓰는 건 저들이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서브 컬쳐의 소비자들하고는 거리가 있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실제로 제가 일상적으로 접했던 일본 섭컬쳐 소비자들 중에선 그런 막장이 별로 없었거든요.




하여튼 06~07년도에 오타쿠 개그가 참 흥했죠. 무뇌충 개그 이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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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참 재밌지 않나요? 제가 06년도 쯤에 본 짤방인데 저때는 그래도 개그의 단물이 빠지기 전이라서 재밌는 소스가 많이 나왔었습니다. 이건 문희준도 마찬가지였고요. 어느 시점부터 걍 유머 코드로서의 단물이 다 빠지고 증오의 분출만 남고 나서야 노잼화 됐지만요. (그런 면에서 일베 친구들은 참 인내심이 대단하지 않나요? 도대체 어떻게 똑같은 소스를 5~6년째 우려먹고 있는지...)




지금 와서 참 웃기는 게, 저때는 '오타쿠'를 가지고 사람들이 진지하게 논쟁을 했다는 거죠. 오타쿠를 까는 게 옳느니 그르니, 오타쿠들이 쓰레기니 아니니를 갖고요. 저런 논쟁에서 자주 등장하던 말이 '오타쿠라는 단어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타쿠인 것이다' 이런 얘기가 있었는데, 저 말을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오타쿠라는 게 사실 인터넷 농담이니, 인터넷 농담을 갖고 낄낄거리고 있는 순간 너도 그렇게 쿨한 놈은 아니야'.




그런데 재밌는 건, 어느 시점부터인가 해서 오덕후라는 표현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옅어졌다는 겁니다. 무뇌충과 마찬가지로 '오덕후' 역시 디씨인사이드에서 주도적으로 조롱 소스를 만들어 냈는데, 바로 그런 증오의 원산지인 디씨 인사이드에서 어느 시점부터인가 '나 ~~덕이야' 라고 자신의 기호를 '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덕후'라는 표현을, 중학생 애들이 왕따 쳐다보듯이 조롱하되 같은 부류로 취급 되는 것은 죽도록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었음에도요.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했던 인터넷 유행어들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부정적인 맥락이 흐려져서 범용된다고요. 전 이건 '증오를 스스로 생산하고 먹어치우기를' 반복하는 대한민국 인터넷 커뮤니티가 가진 일종의 자정 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09~10년도 쯤에 디씨에서 김대중, 노무현을 비하하는 합성 소스가 많이 돌았는데, 엄밀히 말해서 문희준을 비하하는 맥락으로 쓴 거나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비하하는 거나 윤리적으로 큰 차이는 없죠. 걍 대한민국 인터넷 커뮤니티는 태생부터 이랬던 거 같습니다. 증오를 만들어서 스스로 소비하다가 소스가 다 떨어지면 다른 걸로 갈아탄다고요. 그 증오의 대상물이 문희준(개인) -> 오타쿠 (허상의 집단) -> 박재범, 타블로 (한국에서 돈 잘 버는 외국인)처럼 굉장히 구체적이게 점차적으로 노골적인 배타성을 띠어가는 게 유일한 변화의 척도고요. 사실 일베는 10년 전에 문희준을 까며 증오를 소비하던 사람들의 배타성이 구체적인 정치성을 띤 모습일 뿐인 거죠. 걍 다 똑같은 놈들인 겁니다.





'아 몰랑'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할 말은 이렇습니다. 아 몰랑이라는 단어가 여혐적인 맥락에서 쓰인 건 맞는데, 그래도 지금은 저 단어가 유행어처럼 퍼지면서 그 여혐적인 맥락이 옅어지고 용례가 늘어나는 과정에 있으니, 저 단어가 자정되는 중도 과정이 아니냐... 물론 저 유행어 자체는 길어봐야 2년 안에 낡아져서 아무도 쓰지 않겠지만요. 흠좀무라는 단어가 그렇듯이요. 저 단어를 기억하는 분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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