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6 02:21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어들로 쌓아 올려진 탑을 둘러보는걸 좋아합니다. 그런 산책을 여러 번 하다보면, 은전 한 닢처럼 몇몇 고유명사들을 손에 쥘 수 있고 적합한 상황이 아닌 분위기에 어울리거나 멋지게 발음될 위치에 꺼내 보게 됩니다. 그렇게 쓰인 비전문적인 글들이 별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낱말들을 낚기 위해 여전히 밀밭 사이를 방황합니다. 헤매인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글을 써내는 것은 일종의 도를 닦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있어보이려는 욕심을 끊임없이 밀어내야 한다는 면에서 말이죠.
지인이 예전에 저보고 허세 탐지기가 고장났다고 말해 준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별 말도 안되는 허세를 부리고 있을 때, 그걸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죠. 그 말을 금과옥조 삼아 누군가의 말이 혹할 때, 그가 말하고 있는게 허세는 아닌가 회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 세계에서는 짧게 치고 빠질 수 있으니 어떤 정보의 근원이 아닌 곁가지만 말하고, 근원의 모종의 이유 때문에 밝힐 수 없는 상황이라며 비워놓는 편이 많고 세 개의 구멍이 있는 상자처럼 그 안을 남이 알아서 채워넣토록 하는 트릭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말하지 않는 것은 그냥 말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끝까지 다 털어 내었을 때야 강한 사람이라 존중하게 됩니다.
아마 그런 허세에 약한 것은, 제게 똑똑하고 싶다는 욕망이 꽤 높은 순위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있고 싶지만, 알맹이를 보이는 것은 껍데기이니 모순 속에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써놓고 보니 적나라한데, 지적인 것과 지적 허영인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네요. 굳이 껍데기로 알맹이를 보일 필요가 없으니 이미 지적이라면 괴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역시 제 욕망은 똑똑하고 싶은게 아니라 똑똑하게 보이고 싶은 것인가 봅니다. 아아, 그래도 똑똑하지 않은데 똑똑해 보이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똑똑해서 똑똑해 보여야 합니다. 이런 뱅뱅 도는 이야기는 이제 넘겨버리고. (허영심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고 싶지만.)
보니까 이상한 글을 쓰는 패턴이 있더군요. 저는 직장생활 하면서 커피를 아예 마시지 않는데, 가끔 콜라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이룹니다. 액상과당과 카페인에 취해 밤에 잠을 못 이룰때면 이런 부끄러운 글을 쓰게 되더군요. 오늘도 피자를 과하게 먹고, 1.5리터 콜라를 꽤 마셨으니 카페인 과충전 상태입니다. 내일 연차를 내놓아서 마음이 편하기도 하구요 :P 그래도 내일을 더 망쳐놓기 전에 오늘은 좀 더 빨리 자야겠습니다. 무설탕 콜라는 있지만, 무카페인 콜라는 없는 것 같으니 이런 상황을 피하긴 어려울듯 싶군요. 무설탕 사이다를 시도해볼까요. (역시 그냥 물을 먹는게 최고겠군요.)
누군가 '최근에는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보다 적다'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작가보다 독자가 더 희소한 세상이라면 열심히 독자가 되자, 라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막상 쉽지 않은 일이네요. 좋은 책들을 골라 읽는 것도 의외로 품이 많이 듭니다. 좀 더 날렵하게, 읽을 책만을 사는 버릇을 잘 키워봐야겠습니다.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책을 빌려 운에 맡기고 사는 책들은 고심해서 정말 읽을 책들만 사는 식으로요. (하지만 정말 읽을 책일걸 사보지 않고 어떻게 분간할지는... ) 기왕에 독자가 될 것, 더 좋은 독자가 되는 방법은 뭘까 고민할 수도 있군요.
딴소리입니다만 듀나님의 몇몇 단편들은 인터넷 세계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치광이 하늘] 류요.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도 약간. 어떠한 형체로 아무렇게나 변할수도 있고, 각 지역마다 그 지역의 특수한 룰을 따른다는 것도 그렇고. 이미 토끼로 변해버린 듀나님을 상상하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집니다. 또 딴소리입니다만 한국인들은 정말 일 잘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반례를 떠올려보려고 해도 그와 관련된 캐릭터들 밖에 떠오르질 않습니다. 밉상인데 일 잘하는 드라마 주인공들과 해석이 왜곡되어버린 [위플래시]..
... 카페인에 취해 더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자야겠습니다. 최근에 읽은 근사한 책이 있다면 추천 바랍니다.
2021.08.06 09:35
2021.08.06 11:32
2021.08.06 12:02
ㅎㅎㅎ, 글 제목 오랜만에 듣는 표현입니다. 요새는 안 쓰더라고요. '지적 허영심'이 어때서, 그건 좋은 것이야, 라고 외칩니다. 처음엔 허영심에서 출발해도 '지적' 부분을 계속 어떤 식으로라도 추구하다보면 '허영심' 부분은 자연히 녹아떨어진다고 봅니다.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영화, 책, 게시판 글도 '지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고 마음먹고 본다면.
1. 꾸준히 좋아하는 책으로는 저 아래 썼지만 '왕국'(열린책들, 엠마뉘엘 카레르) 추천합니다.
2. 독자, 독서, 작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 좋아합니다. 오후님도 관심 있으실 것 같아서 추천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책은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새물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입니다. 그런데 검색해 보니 품절입니다. 도서관에는 있을 거예요.
'플로베르의 앵무새'(열린책들, 줄리언 반스)도 좋았습니다.
3. 줄리언 반스의 책들은 다 기본 이상으로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온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다산책방)도 좋았어요. 줄리언 반스의 미술에 대한 해박함과 잘 어우러진 개인적이고 문학적 감상들, 곁들여진 그림들까지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었어요.
4. 조르조 바사니의 소설들 다 좋아요.
5.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 같습니다. 위에 줄리언 반스도 그런 책이 있는데 w. g. 제발트의 경우 대부분 책이 그런 것 같습니다. 돌아가셔서 책이 얼마 없는데 저는 '이민자들'(창비) 참 좋았습니다. 추천합니다.
3번 빼고는 오래 전에 나와서 읽으신 것도 있을 텐데 발동걸려서 막 썼네요. 주로 소설과 에세이였습니다.
2021.08.06 13:25
2021.08.06 12:19
저의 지적허영심을 볼작시면 퇴근길에 꼭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둘러보고 계획에 없던 책을 한두권 삽니다.
2021.08.06 13:35
2021.08.06 13:47
단어들이 색깔이 다양한 아주 멋진 문단이네요
잔오님 글 볼 때마다 감탄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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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문단을 완성하시오 (5점) : 탑, 은전, 밀밭, 탐지기, 금과옥조, 근원, 모종, 트릭, 욕망, 알맹이, 뱅뱅, 패턴, 콜라, 연차, 희소, 독자, 알레고리, 캐릭터, 왜곡
2021.08.07 02:05
젠체하지 않고 더 매끄럽게 써내고 싶네요. 부끄러움과 자각을 좀 더 몰아내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2021.08.06 14:01
이동진 독서법을 읽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넒이에의 갈증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허영심을 좋게 평가합니다.
https://brunch.co.kr/@dailytokyo/36
저는 듀게 댓글이나 글 보면서 가령 <악마의 씨>를 만들 때 폴란스키가 원작에 집착하니까 작가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는 나무위키에서 긁어 온 얘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스티븐 킹의 <죽음의 무도>나 원작 소설을 읽으며 나름 비교하는 것도 자신의 저변을 확대하는 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갈수록 독서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동진도 영화 관련된 책보다 철학,순수 과학 서적이 평론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넓게 가져가는 독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엠마 왓슨의 버버리 코트가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그건 맞춤 주문 받아 제작하는 버버리 비스포크 라인 제품이라 그렇다는 건 쓸데없지만 재미있는 지식이죠.
대화에서 새미 소사 얘기가 나오면 소사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아도 참여할 수 있는 거잖아요.
보라색이 차분하게 하는 색이라 심리 치료에서 많이 쓰이는 색이고 정신 질환이 있던 고흐,뭉크 그림에 자주 나타나고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입고 있는 코트가 보라색인 것도 그렇게 설명될 수도 있다죠. 색에 관해 조금만 알아도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죠.
김수현 드라마 작가가 후배들에게 책이라고 생긴 건 무조건 다 읽으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2021.08.07 02:13
독서 방법을 다룬 책이 있군요. 왜인지 자존심 상해 그런 책은 잘 안 읽는 편이에요.
스몰 토크를 하기 위한 지식의 저변을 넓히는걸 즐기시는군요. 저는 거대한 맥락의 일부로서 여러 가지들이 통일성 있게 연결되는 것을 즐기는 편입니다. 보통 그렇게 잘 되지는 않지만요. 기억력이 좋지 않아 책을 읽고도 정확한 내용을 잘 인용 못 하는 편인데, 이 부분은 어떻게 해도 잘 고쳐지질 않네요.
2021.08.06 20:43
지적 허영심... 이란 말이 예전엔 좀 안 좋은 의미로들 많이 쓰였던 것 같은데. 요즘엔 그거라도 갖고 좀 지적인 사람이 되어보려고 애라도 써보렴? 이런 분위기인 것 같아요. ㅋㅋ
아주 오래전에 이 게시판 주인장께서 '스노비즘'의 순기능 얘길 하면서 비슷한 주장을 했었고, 여기저기서 그게 뭐 좋은 거라고 의미 부여를 하냐며 욕 많이 먹었는데요. 그때랑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2021.08.07 02:21
누군가 그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꼿꼿한 스노브 1세대들은 다들 어디가서 뭐하고 있는 것인지. 트위터에서 파편화된 문장 조각들이나, 누군가를 웃기기 위한 글들, 광고 수익을 위한 전단지들을 보다 보면 과거의 그런 글들이 그립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지적 허영심의 첫 번째 룰인 자기 입으로 자기가 똑똑하다고 절대 말하지 않기, 가 지켜지지 않는 세상으로 변해가면서 뭐랄까 다들 맘 편하게 위무지하며 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2021.08.06 21:56
"이미 지적이라면 괴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식은 안다/모른다 이렇게 둘로 나뉘지 않죠.
모른다/조금 안다/대강 안다/좀 더 확실히 안다/정확히 안다/깊이 안다 등등
앎에도 단계가 있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에는 언제나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이고요.
사실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지 못한다면 내가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우니
그럴 경우 과연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며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요?? ^^
2021.08.07 02:30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존재론적 자아와 외적 자기증명 간의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안다면 그러한 존재로서는 그 이상 더 할 것은 없을 거에요.
허영이란게 속이 어찌 되었든 겉으로 그렇게 보이면 되는 것이니, 남들에게 내가 아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글을 잘 써내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지보다는 허영심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죠.
그렇든 저렇든 underground님께 대답하다보니 만족스러운 글을 써내는 것이 선망하는 요체에 더 가깝네요. 그런 글을 써내기 위한 여러 조건들 중 일부를 탐하고 있는 것이었군요.
한국 너무나 일 잘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실제로 일도 아주 잘하는데 행복도는 세계꼴찌인 나라라고들 하더군요.
위플래시 영화보고 저는 호러였고 아동학대라고 격분했는데 한국의 일부의 평가를 보고 아연했습니다. 하긴 공포의 외인구단 훈련 방식이 저 어렸을 때 유행이었으니.
책 추천은 안하고 딴소리 하고 있네요. 저도 좋은 책 추천 바랍니다, 듀게인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