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기화 된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고 사소하지만 이런저런 불편한 사유들이 촉발되어 점심을 혼자 먹기 시작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어가네요.

초반엔 냉장고털이 한답시고 먹다 남은 반찬이랑 밥이랑 도시락 싸갖고 와서 자리에서 먹기도 했는데, 뭐든 목적성 공간 분리에 민감한 사람이라 점심밥은 식당에서 사먹는 걸로 자진타협하고 요즘은 밖에서 되도록 짧게 해결하고 있습니다.


근무하고 있는 지역이 맛집으로 따지면 장안 세 손가락에 들어갈 만큼 맛있고 가격도 착한 편이라 아직도 6000원~7000이면 푸짐하고 맛있는 식사와 풍미를 맛볼 수 있는 맛동네예요. 이 동네에서 근무 3년차가 넘어가고 근처 식당을 다 가본 건 아니라도 고정적으로 다니는 곳에서 맛으로 실망한 적은 없었어요. 

화장실만 지저분하지 않고 분리되어 있으면 남성향?의 식당도 나쁘지 않고, 이미 혼고기&혼술을 시전한 게 벌써 20대부터라 혼밥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지요.


하지만 요즘  몇 주간은 평균대비 비싸면서 맛없고 예의 없는 식당에서 마음이 상하고 돌아오네요,.

애초에 식욕도 식탐도 없는 편이고, 저에게 먹는 행위는 그냥 생존 목적이 가장 크기에 저 또한 하루 중 유일하게 정식으로 챙겨먹는 끼니로는 그 비중과 중요도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게 점심입니다만. 그렇다고 늘 대단한 정찬을 먹을 건 아니지만 그때그때 그날 먹고 싶은 걸 먹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공감할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자영업 하시는 분들 힘들다 힘들다 해도 어떨 때 좀 심한가 싶은 식당들도 더러 있네요.

예를 들어 점심 밥값을 1만원 내는데, 자동주문기 이용에(이건 그렇다치고), 20분 가까이 기다려 받은 식사는 메인인 탕에 공기밥, 그리고 깍두기 서너 점이 고작.

순간 당황해서 이게 전부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묻는 사람 처음 봤다는 식으로 쳐다보면서 반찬은 이게 다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양심상 메인인 갈비탕에 뭐라도 고기가 실한 갈빗대라도 한두 대는 있어야 할 텐데 말라 비틀어진 뼈대에 살이라고는 없대요. 국물은 당연히 MSG맛이 심하게 나고요. 식당에 사람이 하나도 없길래 코로나 때문인가 했는데, 없는 이유가 있었네요... 조만간 여기도 간판이 바뀌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한 군데는 인건비 때문에 알바를 안 쓰고 사장님 가족이 직접 다 서빙을 하는 식당인 것 같은데, 제가 이 동네 회사 입사 초기에 드나들며 봤었던 사장님 아드님으로 추정되는(?) 남자분이 몇년 새 초반의 의욕과 친절함을 잃고 고생한 흔적이 역력해지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급기야 까칠함과 불친절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더니, 얼마 전 방문했을 땐 급하게 그릇을 치우다가 다른 손님들이 고기와 김치를 잘랐던 가위를 떨어뜨려 그게 제 발에 꽂힐 뻔 했는데도 죄송하다는 말을 안 하더군요. 주문을 이미 한 상태였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나왔습니다. 그날로 발길을 끊었구요. 


위의 예시들을 겪은 제 소회는... 말하기 애매하게 뭔가 몹시 기분 나쁘고, 본인들 생업이 힘들다고 저렇게 힘든 티를 손님에게 내나 싶은 불쾌함이었습니다. 

저도 쓸데없는 과도한 친절 , 불필요한 상냥함 따위 거북스러워 하는 사람이지만, 각자 최소한의 역할극을 거슬리지 않게만 해주는 것이 그렇게 힘든가요. 무료급식소에 배급받으러 온 사람에게도 안 할 것 같은 행태에,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하는 생각보다, 코로나에 각박한 시국에 존버하긴 서로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손님한테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2. 

1의 에피에 대한 1g의 인류애도 나눠줄 수 없는 건 저도 살아가는데 지칠 만큼 지쳤고, 질렸기 때문이죠. 평균수명 백세시대에 도대체 내 노년이 어찌될 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일을 해 왔고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이제 더 이상 남의 회사에 기여해서 남 좋은 일 하고 싶지 않네요. 예전에도 회사의 대표라는 인간군상들을 좋아하지 않았고(좋아할 리가!), 내 할일 똑바로 하고 사리분별 잘 하며 절대 어느 정도 이상의 선을 넘지 않도록 철두철미하게 지내왔지만, 결국 2n년 넘는 직장생활에 남은 결론은 회사는 자본주의가 낳은 최고 더러운 똥덩어리가 아닌가 해요. 철저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모순적 집합체.


3. 

그 와중에 만났던 숱한 관계들 중 간혹 이건 진짜다 싶은 인연들도 있었지만, 결국 관계에 염증나는 계기들을 기회로 제가 일방적으로 다 단절하고 차단하고 지냅니다. 지금 제가 다니는 조직의 남은 인력들과는 철저히 그냥 어쩌다 마주치는 동네 주민들 같이 인사 한 두 마디 나누고 각자 할 일 하면서, 하지만 내가 내리는 지시와 명령은 그들이 수행해야할 것이고 그 지점이 잘못됐을 땐 내 가차없는 비판과 독설을 견뎌야 하는 순서만 남겨놨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떠난 사람들은 결국 저에게 오게 돼 있는 건가요? 

제 속으로 스스로 쌓아두었던 벌점을 계기로 차단한 관계들임에도(저는 철저히 제 어떤 모습도 노출되지 않도록 다 막아버립니다)그들은 기어이 연락을 해와요. 나에 대한 뒤늦은 소중함 때문이든 뭐든, 그런 미련함 따위는 내 영역이 아니므로 답은 커녕 미동도 않고 응하지 않으며 몇 년이 지났음에도요.


일전에도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길래 뭔가 봤더니 제 밑에서 일하던 후배였습니다. 이미 내 성격을 아는 사람이고 내가 어떤 조치를 취했을 거라는 것을 잘 알 것이기에, 내게 그 신호를 보내기까지 망설였을 고민이 엄청난 방어적 문장으로 점철된, 이를테면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도 생략하고 잘 지내셨죠? 이후 그동안 내 생각이 많이 났다면서 본인 메세지가 불편하면 연락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문자를 보고 이게 무슨 뜻인가 싶다가, 네네 저는 답을 하지 않았어요. 그 와중에 끝까지 체면은 잃고 싶지 않는 그 행간들을 읽으며 불편보다는, 그냥 싸인에 응할 필요를 못 느껴서요. 


직장에서 만났든 사적으로 만났든 대다수 관계에서 다들 본인들 더 잘살아보겠다고 떠났을  때 저는 충분히 행복을 빌어줬고 누구 하나 섭섭치 않게 보내줬어요,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그리고나서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서 저는 그 관계들을 미련없이 접었죠. 누구와든 내 옆에 있을 때(만) 잘하자,가 

제 인생의 모토거든요. 모든 관계의 골든타임은 현존하는 지금이 가장 유의미 한 것! 그리고 부득불 떠나게 됐을 땐, 떠난 직후부터 더욱 공들여 가꾸기 시작해야 하는 법. 그 사소한 중요도를 알지 못하는 당신들은 왜 내가 언제든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멋대로 착각하는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돌아오면 받아줄 것이라는 방만하고 오만함에 응답할 이유는 여지껏 찾지 못했어요.  


4. 

아름다움만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주문을 걸며 주 7일, 평균 10회~12회가 넘는 발레 수업을 듣고 있어요. 발레를 하기 시작한 건 몇 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미쳐있는 건 처음이죠. 지인 농담대로 무슨 국발 입단할 거냐는 소리 들어가며 하고 있는데, 현생의 일과 발레의 비율이 이제는 49 대 51로 역전이 됐을 만큼 엄청난 일과가 됐네요. 지금 제 직장은 그냥 발레비를 벌기 위한 ATM기계일 뿐입니다, 저 같은 일충이가 이렇게 됐다는 게 스스로도 놀랍지만 더더욱 놀라운 비극인 건...


일하는 시간 말고는 다 쏟아붓고(주말, 일요일, 공휴일, 휴가 때까지 다 발레, 틈만 나면 발레할 생각 뿐인 뇌구조) 갈아넣는데도 노력대비 실력이 너무 일천하다는 냉정한 팩트예요. 지난 몇 년간, 제가 발레에 투자한 모든 것을 일의 성과로 따졌다면 저는 이미 독립된 하나의 회사를 차리고도 남았을 투자와 열정이었는데, 이 취미가 이렇습니다. 고단한 삶의 여행처럼 즐겁자고 시작한 취미가 발목을 잡아서 요즘엔 고행이 됐지만 이렇게 자처한 것은 본인이므로 누구를 원망도 못하죠.


강박증에 완벽주의 성격 때문에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이유로 콩쿨도전은 계속 미루고 있지만, 그래도 올 가을엔 취미인으로서는 엄청나게 과분한 규모의 무대에 서게 됐습니다. 그에 걸맞는 실력이 되고자 평일 퇴근 후  저녁마다 데일리 클라스에 주말집중 클라스 & 공연연습 +일요일엔 개인레슨까지 쉴 틈이 없어서... 

요즘엔 고양이랑 놀아줄 시간도 없는게 제일 안타깝네요.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좋은 이  두 가지를 내 생활에서 만끽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벅찬 시기를 그나마 견디는 숨통이 되어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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