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로스트 도터] 보고 왔습니다

2022.07.14 23:14

Sonny 조회 수: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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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는 흰 옷을 입고 비틀거리면서 해변가를 향하다가 파도 바로 앞에서 쓰러집니다. 옆으로 누워있는 그의 몸 위로 [로스트 도터]의 타이틀이 떠오르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영화의 시간 순서를 따르면 이 첫번재 씬은 레다가 그리스의 휴양지를 갔다가 떠나오는 마지막 씬이기도 합니다. 처음이 끝이 되는 이 수미쌍관의 구조에서 전개되는 내용들은 레다가 바닷가에 쓰러진 채로 하는 무의식적인 회상, 즉 플래시백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를 자책하면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답을 꿈에서 찾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타이틀이 뜬 이후의 내용은 레다가 휴양지에 도착한 이후 그가 니나의 가족들과 얽히면서 생기는 일입니다. 니나 가족의 어떤 모습들, 특히 니나와 그의 딸 엘레나가 일으키는 일상적 파열음을 들을 때마다 레다는 계속해서 자기자신의 과거를 떠올립니다. 지금보다 젊었던 레다에게 어린 딸들은 어떤 의미였는지, 딸들과 함께 살아나간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비춰줍니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들이 떠밀려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전개는 바다의 파도가 왔다가는 형태와 닮아있습니다. 이 영화 전체를 바다에 쓰러진 레다의 회상이라 생각해본다면 그의 몸과 얼굴을 파도가 적실 때마다 기억도 함께 밀려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레다에게 들이닥치는 건 과거의 기억들만이 아닙니다. 레다의 주변을 빛과 소음이 계속 침범합니다. 레다가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그가 전혀 알지 못했던 등대 불빛이 방안을 비춥니다. 레다가 해변가에서 기분좋게 누워서 쉬려고 하자 열댓명의 무례한 가족들이 시끄럽게 우르르 들어옵니다. 레다가 잠을 잘 때는 베개 옆에 매미가 떨어져서 계속 울어댑니다. 레다가 밥을 먹을 때는 관리인 라일이 옆에서 추근대기도 하고 니나네 가족에게 무례한 언사를 받으며 위협당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두가지 의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중년의 여성이 혼자서 어딘가를 다닐 때 개인으로서 안전이 충분히 보장되는가. 그의 신변이 이토록 위협받는 것은 그가 마음의 휴식을 찾기 위해 '도피한' 과거의 기억이 계속 그를 쫓아오는 은유는 아닐까.


레다가 가장 많이 자극을 받는 광경은 니나가 딸인 엘레나와 엉켜있는 장면들입니다. 부유하고 무례한 대가족 안에서 니나는 혼자 있고 싶어하지만 엘레나는 엄마를 계속 찾으면서 누워있는 니나를 괴롭히다시피 붙어있습니다. 이 때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딸의 모습이 아니라 딸과 함께 있을 수 밖에 없는 니나의 모습입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놀고 어머니가 딸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우린 믿지만, 만일 그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어머니가 쉴 시간이 전혀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것은 '행복'이나 '사랑'같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여자가 어머니의 책임을 감당할 때 혼자만의 시간을 도저히 내지 못하는 현장의 연속입니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지독할 정도로 이어지는 책임의 연속입니다. (한국의 육아예능들은 클로즈업을 아이들의 모습만을 잡으면서 프레임 밖으로 누구의 어떤 표정을 밀어내고 있는지요)


레다의 기억 속에서 젊은 레다는 두 딸들에게 계속해서 치입니다. 딸이 엄마에게 서운해서 토라져있으면 그 딸을 위로하려고 레다가 침실로 들어갑니다. 그럼 남겨진 다른 딸이 자신을 안돌봐준다면서 울기 시작합니다. 두 딸을 위해 쪼개질 수 없는 레다에게 '딸이 없는 순간의 자유로운 자신'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일을 하느라 집에서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이 기억 속에서 레다는 딸들에게 화를 내거나 진절머리를 내거나 지쳐서 말을 하지 않는 상태로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레다 눈 앞의 니나와 엘레나의 모습은 위태롭습니다. 다만 가족 중 그 누구도 그걸 깊이 신경쓰지 않습니다. 


니나가 엘레나를 잃어버리고 해변의 모든 사람에게 딸의 행방지를 물으며 해변이 어수선해질 때, 레다는 자신이 딸 비앙카를 바닷가에서 잠시 잃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머니로서 위급한 상황을 겪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 한명이 어머니로서 모든 걸 책임질 수 없을 때 터지게 마련인 가정의 부도처럼 느껴집니다. 레다는 해변가 숲 속에서 혼자 노는 엘레나를 찾아와서 니나에게 안겨주고 그 둘은 작은 유대를 쌓습니다. 그럼에도 엘레나를 찾은 뒤 니나와 레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여전히 긴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 뒤에서 계속 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데도 딸에게 우선 가기보다 그 상황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하며 레다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니나 때문일 것입니다. 사라졌던 딸을 찾았을 때 어머니로서 딸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딸을 다른 가족들에게 맡긴 채 니나는 숨을 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반 영화였다면 딸을 끌어안고 자기가 잘못했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 대신, 그제서야 한 개인으로 숨을 돌리는 니나의 모습은 조금 생경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취해있을 환상 너머의 현실일 것입니다. 


레다가 니나의 딸을 찾아줬지만 영화는 그것으로 모든 갈등을 갈무리하진 않습니다. 어째서인지 레다는 니나의 딸이 애지중지하는 인형을 가방에 챙겨왔고, 니나네 가족은 그 인형을 아예 전단 수배까지 하며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니나는 레다를 만날 때마다 딸이 그 인형없이 잠도 안자고 계속 떼만 쓴다면서 괴로운 티를 냅니다. 레다는 자신이 그 인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숨기면서 니나의 고민을 들어줍니다. 영화는 중반 이후로 레다가 인형을 숨기고 있다는 것으로 작은 서스펜스를 일으키며 이야기를 끌고 나갑니다. 레다는 간혹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그 인형을 어디다 둬야할지 고민하면서도 그 인형을 안고 잡니다. 


아마 이 부분이 영화의 가장 큰 질문일 것입니다. 왜 레다는 니나의 딸의 인형을 가져와서 며칠간이나 숨겨두고 그걸 주지 않았는가. 레다가 그 인형을 품에 안고 자는 장면들은 그가 자신의 딸과 자는 것처럼 보입니다. 툭하면 파고드는 플래시백들 속에서 딸들은 레다를 괴롭게 하고 레다는 진빠진 얼굴로, 혹은 화가 잔뜩 차 찡그린 얼굴로 딸들을 통제하려 합니다.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레다는 인형과 평온하게 자고 있습니다. 인형은 사람처럼 뭔가를 먹이거나 돌봐주거나 달래줘야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그의 기억과 대비되는 인형과의 평화로운 현재 시간을 볼 때 레다는 가상의 딸과 안전하고 고요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롭지 못했던 자신의 '젊은 엄마' 시절에 대한 후회를 그는 인형을 끌어안고서 다시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인형이 아니었다면 그런 얌전한 휴식은 불가능했을테니까요.


그것은 자신의 모자란 육아실력에 대한 단순한 자책은 아닙니다. 후에 레다는 니나에게 고백하다시피 자신의 과거를 고백합니다. 자신은 딸들을 키우는 것을 견디다 못해 3년간 아예 집을 떠나있었고 남편과 자신의 친엄마가 레다의 딸들을 대신 키웠다고. 레다가 그 인형을 돌려주지 않는 것은 자신이 버려버렸던 어머니로서의 시간을 보상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이 때 영화는 레다가 엄마 역할에서 도피하는 동시에 강한 성욕을 느끼는 레다를 보여줍니다. 학회에서 호출을 받자 레다는 신나는 표정으로 집을 떠나 학회를 향합니다. 그곳에서 매력적인 다른 교수를 만난 그는 기꺼이 그와 육체적 사랑을 나눕니다. 그것은 육아에 지쳐서 저지른 일탈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욕망인 성적 욕망을 채우면서 엄마의 위치에서 해방된 여성으로서의 레다를 보여주기도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면 더 이상 여자가 아니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영화는 꽤나 급진적으로 결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런 레다의 모습은 현재 시간대에서 젊고 친절한 남자 윌과 불륜을 저지르는 니나와 겹쳐집니다. 


이후 니나는 윌을 통해 자신이 레다의 집을 몇시간 빌려 윌과 사랑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황당한 부탁에 응하는 레다의 모습은 엄마가 된 여자의 부자유와 고통을 이해하는 동지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집 열쇠를 주면서 레다는 니나의 딸의 인형을 돌려줍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인형을 찾은 게 아니라 갖고 있었다는 고백까지 하면서 이내 니나의 분노를 삽니다. 우리가 그 인형이 없어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는데 대체 왜 그랬냐는 니나의 욕설을 통해 영화는 그 인형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을 합니다. 만약 레다가 인형을 통해 단순한 심적 안정을 얻으려 했다면 그것이 굳이 니나의 딸의 인형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을 가져가버려서 니나의 가족들, 특히 니나의 딸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레다가 직접 말하진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세상 모든 엄마들을 향해 레다가 가진 일그러진 충고일지도 모릅니다. 니나의 이모 칼리에게 했던 말처럼, 아이를 갖는 건 사실 엄청난 부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듯이 그는 직접 다른 엄마에게 엄마로서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자기가 엄마로서 엄청나게 힘들었으니까. 자기가 딸을 힘들게 한만큼 다른 엄마들도 그들의 딸을 힘들게 해야 자기만 특별히 못되고 이기적인 엄마가 아니게 될 테니까요. 최소한 자신만큼 누군가가 힘들어야 엄마로서 힘들었던 걸 공평하다 믿을 수 있었을지도요.


레다는 황급히 휴양지를 떠나옵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렀다가 그는 엄마이면서도 다른 엄마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악한 여자이자 미친 여자로 비난받을테니까요. 위태로운 운전 장면을 보여주다가 영화는 차에서 잠깐 내려 해변가로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첫번째 장면을 다시 보여줍니다. 이후 파도에 정신을 차린 레다가 자기 딸에게 전화를 거는 걸 보여줍니다. 레다는 어린 딸들에게 했듯이 오렌지 껍질을 한번도 안끊기고 깎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엄마로서 딸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지독한 인연이자 그래도 엄마로서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레다의 소박한 의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엔딩이 다정하지만은 않은 것은 니나가 머리핀으로 레다의 배를 찔러서 피가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엄마에게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 받아야 간신히 해소할 수 있는 그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다의 주변으로 파도는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길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레다는 딸 같은 니나를, 잃어버렸으니까요. 그렇게나마 간신히 친딸들과의 유대를 되찾으면서도 그는 또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느 날은 자신을 혐오하고 어느 날은 또 딸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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