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6 19:22

말하는작은개 조회 수:443

어린시절 항구도시에 살았어요. 드넓은 바다가 도시의 반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죠. 모로코처럼 말예요. 옛부터 해적의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어요. 바다에서 조금만 나가면 있는 해협은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거든요. 나쁜 놈들이죠. 도시 사람들은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바다일을 나갈때 무기를 챙겨들고 나갔고, 평소에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게 발전해서 근대에는 해군에 자원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중엔 도시의 경제활동인구가, 음, 시장에 나가서 살펴보면 하얀 제복을 입은 해군반 바다일하는 사람들 반이었다고나 할까요? 아저씨도 젊을때는 해군이었다고 해요. 20대에 직업군인으로 살다가 우연한 사고로 크게 다친 뒤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어요.


아저씨를 좋아한건 열두살 때였어요. 고백을 했지만 당연하게도 받아주지 않았죠. 저는 지나치게 어렸어요. 신체도 그러하였지만 정신연령도 또래보다 나을 것이 없었죠. 사실 받아주길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냥 그건 동경같은 거였어요. 학교에서 선생님을 좋아하듯이 말예요. 꼭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죠. 하지만 미련은 남아있었죠. 아저씨는 메타세쿼이아 나무처럼 큰 키에, 외출할때는 꼭 갈색 트렌치코트를 입었고 세피아톤의 단발머리에, 살짝 컬을 했어요. 그당시 남자들에게선 보기 힘든 머리모양이었죠. 그것조차 멋있었어요.


그시절에는 모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게 아니었죠. 학교를 다닌다 해도 오전에 잠깐 갔다가 오후에 일을 하러 가는 경우가 태반이었어요. 저는 어린시절 국어를 읽고 쓸 정도로만 학교를 다녔어요. 여자아이들은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부잣집 아가씨가 아닌 이상은 초급과정까지만 배웠어요. 남자아이들은 조금 나았죠. 가난해도 성적이 아주 좋으면 국비장학생이 되어 위로 진학할 수가 있었죠. 저는 토속 음식점에서 급사를 했어요. 주문을 받거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요리재료를 다듬었죠. 직접 요리를 하는건 어디까지나 주방장이었어요.


밤에는 티비를 봤어요. 근처 만화방에서 흑백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요금을 받고 사람들을 입장시켰어요. 일한 돈을 꼬박꼬박 티비에 갖다바쳤죠. 처음에는 만화를 보기 위해서였어요. 그림이 움직이는게 신기하고 재미있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만화시작전에 하는 광고를 보게 됐는데 화려한 털목도리를 한 여배우의 CF에 반해버렸어요. 그때 의상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있는걸 알았죠. 가까이서 그녀들의 옷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직업이요. 동화속의 공주님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요정들 같았죠. 소문에 수도에 가면 몇몇 유명한 부띠끄가 있는 거리가 있다고 했어요. 가보고 싶어서 마음이 간질간질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죠. 나는 이 도시에서 죽을때까지 살테고, 아저씨와 결혼할 일도 없을 거라고요. 제가 자라면서 아저씨와 종종 마주쳤지만 아저씨는 전혀 저를 이성으로 보는 것 같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저씨는 어느날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죠. 머리가 커지면서 현실을 똑똑히 느끼게 된 뒤 바보상자를 보는 일도 그만두었어요. 정말로 바보상자였어요. 환상의 세계를 쳐다보며 침이나 흘리고. 눈을 돌리면 내 손에는 석쇠에 구운 생선이 담긴 뜨거운 접시가 놓여있었고 손님이 재촉하기 전에 빨리빨리 갖다주어야 했죠. 그것이 즐거운 이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스트레스였어요. 항상 시간은 바쁘게 돌아갔어요.


15,16살이 되자 또래들은 하나씩 결혼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도 마땅한 짝을 찾아야 했죠. 학교 동급생이었던 백발머리 남자애를 찍어두었죠. 그애도 저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요.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인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만한 똑똑한 면모를 가진 아이였죠. 품성이 바르고 유머가 있었어요. 그애는 뱃일을 할까 군인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적게는 상업이나 관리쪽으로 나갈수도 있었죠. 저는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어요. 둘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떤 쪽이든 상관없었죠....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어요. 백발머리 남자애는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고, 외계인들은 우리들을 마음에 내키면 죽이고, 살렸어요. 모두가 공포에 떨어야 했죠. 그들은 사람들에게 고기처럼 등급을 매겼어요. 어떤 기준에 의하여. 저는 안타깝게도 제일 낮은 등급이었죠. 마땅히, 천대받고 경멸받아야 했어요. 외계인들은 제 외모를 놀리고 비웃으며 깔깔댔어요. "왜 그러시죠? 그만 놔두세요!"  시달리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난 제가 주제도 모르고 소리를 질러봤어요. 단박에 맞았어요. 그즈음에 바다 너머로 떠나갔던 아저씨가 왠일로 돌아왔어요. 아저씨의 등급은 1등급이었어요. 외계인들은 그에게 준외계인 대우를 해주었어요. 자신들과 똑같은 인격체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존중해줄만하다는 얘기죠. 외계인들은 아저씨와 제가 아는 사이였다는 걸 눈치채고는 교배를 시키자고 했어요. 높은 등급과 낮은 등급을 섞으니 밸런스가 맞지 않냐고요. 반강제였어요. 즉사천리로 결혼식을 올렸죠. 아저씨의 표정은 알 수 없었어요. 좋아하는 것일까? 싫어하는 것일까? 결혼식을 올리면서 훔쳐봤지만 미묘한 얼굴이었죠. 하객인 외계인들은 높은 등급의 사람과 결혼하니 저에게 영광인줄 알라고 했어요. 이런일은 흔치 않다고요. 불쾌했지만 한편으로 아저씨와 결혼하는건 마음에 들었어요. 이유아 어쨌든 결론이 흡족하다니, 기회주의자적인 생각이라는 판단은 들었지만 마음 속으로만 간직하고 누구에게 드러내지 않았어요.


아저씨는 결혼하고서 신혼집으로 옮기게 된 며칠 후, 저에게 소개장을 내밀었어요. 이게 뭐죠? 제가 받아들었어요. 수도로 가는 기차표와 유명 부띠끄에 저를 추천해주는 소개장이었어요. 아저씨는 함께 있지 않아도 상관없다 했어요. 꿈을 이루라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와 의상디자이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어요. 그냥 받아들였어요.


그전까지는 한번도 디뎌보지 못한 부자들의 거리에서 아저씨가 연결해준 부띠끄는 한켠에 조용히 서있었어요. 말끔하게 닦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종이 딸랑 울리는 소리가 났어요. 이래도 되는건가? 그순간에도 양심에 찔리지 않다 하면 거짓말이었죠. 수많은 소녀들이 부띠끄에 들어가고 싶어 줄을 서있는데 인맥으로 가뿐히 첫관문을 통과하다니요. 그녀들에게 미안해서 태도가 쪼그라든 말린 과일처럼 움츠러 들어있었어요. 부띠끄에서 두리번거리면서 안을 살피는데 기척이 없어 사람이 없나 싶을 때쯤, 안쪽에서 입술을 새빨갛게 두덕두덕 칠한 중년여인이 나타났어요. 마릴린 먼로처럼 하이힐의 한쪽다리를 싹둑 잘랐는지 씰룩씰룩거리는 고양이같은 걸음새였죠. 딱봐도 엄청 엄한 가정교사 같은 분위기였어요. 아가, 잘못 들어왔다면 나가거라. 우리 가게는 아무에게나 옷을 팔지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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