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계속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발단은 퀴어 퍼레이드였어요.

예전에 듀게에서도 이런 얘기가 몇 번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주변의 어떤 사람이 퀴어 퍼레이드는 도대체 왜 하는 거냐고 묻더군요.

왜 그렇게 스스로를 추하고 괴상하게 보이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오히려 일반 사람들에게 혐오감과 편견만 심어주는 게 아니냐고 하더군요.


제가 식견이 짧아 제대로 설명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걸 총동원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퀴퍼에는 이러이러한 역사가 있고 이러이러한 이유로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런 역사적인 맥락과 상징적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냥 그 사람처럼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겠죠.

그렇다면 퀴어 퍼레이드는 그 사람 말대로 역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의 목적이 성소수자들끼리 순수하게 즐기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일반인들에게 어떤 인식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면, 지금까지보다 헤테로 친화적인(후진 표현 죄송합니다. -_-) 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나, 그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었죠.


loving_rabbit 님이 올리셨던 미 한인 교회 목사의 글에 대해서도 반응이 크게 두 가지로 갈렸는데요

조금 나아 보이지만 결국엔 동성애를 차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피장파장이라는 입장과

목사의 발언에 다소 문제는 있지만 그 집단 내에서 이런 목소리를 낸 용기를 칭찬해주는 것이 전략적으로 볼 때 긍정적이라는 입장이었죠.


많은 분들이 '협박'이라고 느끼셨던 우중다향 님의 발언도 그런 의미겠죠.

진성 호모포비아에 비하면 우중다향 님은 호모포비아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거고

엄격한 잣대로 보면 호모포비아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듀게에서야 이런 분이 소수지만 세상에서는 다수일 수 있고요.

그러면 이 다수의 논리적 허점을 공격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서는 것이 전락적일 수 있습니다.


이 '전략적'이라는 말이 참 그렇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소위 '과격한' 페미니즘은 오히려 거부감만을 가져올 뿐이다, 남성의 지지와 연대를 끌어올 수 있도록 부드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부드럽게 설득하는 것이, 과격하게 지적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 같죠.


실제 생활에서, 저는 집안 식구들과 얘기할 때는 과격한 편이고(그들은 어차피 제 모든 성격적 결함을 알고 있으므로)

친한 친구들과는 이런 사안들에 대한 견해가 같아서 논쟁할 일이 아예 없고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아예 설득하려는 시도를 안 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가끔은 부드럽게 설득을 해보려고 하기도 하는데, 결과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식견이 짧고 설득 기술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제가 설득을 하려고 한 입장이었을 때는, 이미 상대방의 의견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는 경우

부드럽게 설득을 하든 과격하게 지적을 하든 둘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제가 생각을 바꾼 경우들을 떠올려 보면

지적이고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생각을 바꾸게 된 경우는 기억나지 않고

상대방의 굉장히 과격한 반응이 있었을 때,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을 당장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경우들이 기억나요.

그러다 결국에는 생각을 바꾸게 되기도 했구요.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경우는 지역 감정에 대한 것이었는데,

저는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쪽에서 그렇게 받아들여 굉장히 과격하게 반응했어요.

그 일이 있었을 당시에는 상대방의 과격한 태도에 굉장히 기분이 나빴고,

그쪽이 과민반응을 하는 거고, 난 틀리지 않았어, 내가 옳아, 난 지역 감정 따위 없어, 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쪽에서 자기가 과민반응을 했다며 사과했고, 저는 안심했어요.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제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로 내 안에 지역 감정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일에 대해서는 아니었어도, 다른 점에 대해서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얼마나 지역 감정과 관련해서 당한 게 많았으면 그런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

등등 그때까지는 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하게 되었죠.

그러니까 저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지역 감정'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그 불쾌한 사건을 계기로 생각을 하게 된 거였어요.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듀게에서 어떤 분이 'ㅂㅅ'이라는 표현을 장애인이 아닌 사람에게 쓰면 괜찮지 않냐 이런 글을 올렸는데

어떤 한 분이 그에 대해 엄청나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셨어요. 글쓴 분에게 심한 저주를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알고 보니 그분의 매우 가까운 지인(아마도 가족일 듯한)이 장애인이라고 했죠.

결국 그분은 듀게를 탈퇴하셨고 논쟁은 끝났지만

저는 그 일을 계기로 어떤 경우에도 그 표현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특이한 쪽일 수도 있고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설득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지만..

제 경우에는 그런 상대방의 과격한 반응으로 인한 충격, 혹은 부정적인 감정이 결국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저 같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현재 방식대로의 퀴어퍼레이드나, 과격한 페미니즘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신사적인 게 옳은 것일 수는 있지만

모두가 신사적이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물론 모두가 과격해도 안 되겠지만요(...)


두서 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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