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저리> 보고 왔습니다

2020.07.17 08:31

Sonny 조회 수:605

정말 끝내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사실 설정이나 이미지로서도 하나의 고전이 되어서 여러 상황에 인용될만큼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 밖에 없겠더군요. 이 영화에서 제임스 칸과 케시 베이츠의 "이미지"(전 지금 연기라고 안했습니다)는 놀라울 정도로 딱 맞습니다. 아마 이런 것도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후대 사람의 끼워맞추기일지도 모르는데, 보다보면 전혀 몰랐던 디테일들에 계속 놀라게 됩니다. 이를테면 애니 워크스가 화를 내는 타이밍 같은 건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이 여자의 분노는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것이어서 폴 쉘든처럼 계속 긴장하고 애써 웃음을 짓게 됩니다. 어떤 장면들은 공포영화로서 악 소리가 나오게 만드는데... 그건 보면서 확인하시길. 저는 공포영화를 볼 때 유난히 리액션이 큰 편인데 제가 제임스 칸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중얼거리고 있더라고요... 제발... 제발...



이야기는 재수없는 남자가 미친 여자를 만나서 겪는 해프닝입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적으로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이 미친 여자, 애니 워크스는 폴 쉘든이라는 남자가 쓴 소설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이 이야기는 남자가 매력적으로 만든 세계에 갇힌 여자가, 그 세계를 깨부수고 남자를 역으로 지배한다는 여성의 전복이기도 한 거죠. 그 역전의 결과가 초반부터 너무 압도적이어서 잘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 신에게 거역하는 여자의 이야기기도 합니다. 창작자는 작품을 다스리는 일종의 신이잖아요. 남성 작가라는 신을 하찮은 여자 인간이 지배하면서 세계를 재구축하고 여자의 욕망을 투영하는 겁니다. 애니 워크스는 분명히 말합니다. "미저리를 죽이지 마!" 남자가 만든 세계에서, 그 세계의 주인공인 여자를, 독자인 여자가 구해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간의 연대는 전혀 아니고 순전히 자기가 이입한 캐릭터의 죽음을 견딜 수 없는 동기이지만 어쨋든 여자가 자기자신을 구해낸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거죠. 애니가 미저리를 다시 살려내는 이야기인겁니다. 미저리는 왜 죽었나요. 작품세계를 다스리는 신, 폴 쉘든이 지겨워져서 죽인 겁니다. 딱히 작품 내의 서사적 완결성을 위한 장치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작가의 변덕이고 현실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이건 좀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써먹다가 버린 거죠. 어찌보면 애니 워크스의 광기는 이 버릇업는 폴 쉘든에게 미저리가 내린 천벌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미저리>를 페미니즘적으로 본다면 육체적 권력의 전복도 떠들어야겠죠. 신체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강할 때가 많지만 <미저리>에서는 완벽하게 뒤집혀있습니다. 폴 쉘든이라는 남자는 두 다리가 부러지고 한쪽 팔도 부러진 상태라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에 비해 애니는 사지가 멀쩡하고 신체적 힘도 꽤 센 편입니다. (그는 무려 눈보라를 뚫고 성인남자를 업은 채로 걸을 수 있습니다!) 애니는 툭하면 화를 내고 비교적 초반부에 자신이 이 상황을 자기 멋대로 지배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의사한테도 경찰한데도 전화안했으니까 알아서 해! 그런데 폴 쉘든은 찍소리도 못합니다. 육체적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요. 다시 한번 육체적 권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권력이란 걸 무슨 사회적 지위나 관계에서만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판 모르는데도 남자와 여자사이에는 늘 권력이 작용합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니까요. 그걸 뒤집으면 남자가 여자한테 계속 쫄아서 기분을 푸느라 열심입니다. 폴은 영화 끝날 때까지 내내 비위맞추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는 완벽한 피지배자이며 그 권력에 길들여진 존재입니다. 이 영화는 성별을 바꾸면 절대로 재미있을 수가 없는 가학 포르노가 되겠지만, 여자와 남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공포라는 장르가 된다는 것은 꽤 재미있고 씁쓸한 일입니다.



짧게 써보려고 했는데 이야깃거리가 계속 떠오르네요. 페미니즘적으로 본다면 <미저리>는 가정폭력에 대한 우화로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육체적 힘이 센 자가 육체적 힘이 약한 자를 완전히 통제하고 자기가 요구하는 일만 하면서 여생을 보내라고 하는 것은, 폭력적인 남편들이 온순한 아내에게 가부장적인 과제를 강요하는 그 양상 그대로가 아닐까요. 어쩌면 이 영화의 애니를 무서워하는 것은 이 여자가 미쳐서가 아니라, 애정을 주면서도 자신의 변덕과 폭력을 다 견디라 하는 그 행태가 가부장적인 남편의 행태들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코메디가 되지 못합니다. 자유로운 삶이 당연한 사람에게 비이성적인 폭력을 계속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서운 건 폴이 집 밖을 아예 나가지도 못한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가사에 얽매인 힘이 약한 존재를 떠올려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어쩌다보니 일시적인 가모장제 아래에서 폴은 신물나는 폭력을 겪고 있는 거죠. 소설 속 미저리란 여자가 이 둘 사이의 아기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폴이 낳은 아기이고 애니는 이 아기를 잘 키우라고 계속 닥달하고 있습니다. 독박육아를 겪으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양육자의 이야기도 될 수 있겠죠.



애니 - 폴 부부(?)와 대조되는 것이 보안관 부부입니다. 완전히 불평등한 이 미저리 커플에 비해 보안관 부부는 비교적 평등합니다. 일단 보안관 부부는 일을 분업하고 있습니다. 너는 일을 하고 나는 그런 너를 보살피겠다는 가족의 우두머리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아니죠. 부인은 남편에게 툭 하면 쓴 소리를 던지고 남편은 늘 그 소리를 투덜대면서 받아칩니다. 그 틱틱대는 유머를 주로 던지는 쪽은 부인 쪽입니다. 대화에서도 이 둘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다소 역전되어 어느 정도의 균형을 맞추고 있죠. 특히 재미있는 게 영화 초반에 나오는 부인의 성적인 유혹입니다. 부인이 차를 몰면서 슬며시 남편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자 남편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면서 그냥 넘기려하죠. 그러자 부인이 말하길 "나는 오늘 집에서 당신과 잠복근무를 하고 싶어요"라면서 짓궂은 농담을 합니다. 사실 이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에요. 나이 지긋해보이는 부부가 이렇게 성욕을 불태우기는 쉽지 않지 않을까요? 성을 아내가 주도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부부는 꽤나 평등한 관계인거죠. 미저리 커플에게는 딱 하나의 성적 긴장감밖에 없습니다. 다리를 통해 비유되는 거세의 긴장입니다. 언제 잘라버릴 것인가, 언제 잘릴 것인가. 심지어 애니는 폴에게 반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미저리>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또 다른 페미니즘은 육아의 영역입니다. 애니는 어쨌든 폴을 계속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니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 어머니로서의 여자가 폴에게 아주 난폭해지는 순간들이, 모성애의 신화에서 노동의 귀찮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닌 여자입니다. 그래서 툭하면 아기같은 이 연약한 폴을 두고 화를 내거나 자기 편의대로 통제합니다. 육아에서 의무와 도덕을 제거했을 때, 이렇게나 폭력적인 현상이 발생합니다. 여자는 그래서 좋은 엄마가 되어야한다는 게 아니라, 여자가 좋은 엄마가 되는데는 상상을 초월하는 감정노동이 뒤따릅니다. 어쩌면 어머니와 아기의 관계는 늘 죽여버릴 수 있지만 죽여버리지 않고, 어떤 감정적 거래를 통해 유지되는 일반적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포악한 여자는 페미니즘의 질문을 가장 흥미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여자의 불합리한 분노와 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것들이 텍스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애니 워크스도 불쌍한 여자죠. 폴이 그 불쌍함에 드럽게 휘말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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