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같은 만남

2019.08.24 19:35

어디로갈까 조회 수:1120

매월 있는 정례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 여성 7인과의 만남인데 뭔가 공허한 느낌이 있어 가끔 빠지곤 하는 모임이에요. 저를 포함한 여덟 명의 직업은 제각각 다르지만, 여성이고 비슷한 나이대고 미혼/비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만남의 시간은 나쁘지 않아요. 물에 잉크를 떨어트리면 전체에 골고루 퍼져 하나의 색이 되듯이, 그렇게 곧잘 한 모습으로 어우러지곤 하죠. 서로의 시선을 붙들며 다정하게 웃고, 농담과 정보를 주고받고, 격려와 관심을 교환하고, 세계의 현실을 걱정합니다. 모두들 그런 '대화적 상황설정'에 항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요. '우리'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가장 어색해 하는 게 실은 이것이었을 거에요. 자신의 개성을 숨기고 '개성 없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 이 모임의 구조적 설정 자체를 먼 발치에서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그걸 모른다는 듯 대화에 끼지 않고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성대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9번 째 새로운 멤버였어요. (국적은 패스~)  모임 시간 내내 그녀의 얼굴은 마치 "행복의 표정은 하나지만, 불행은 제각각" 이라는 속담을 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말하자면 무방비의 얼굴이었어요. 상처입은 사람이라는 느낌의 그 얼굴은, 상처입은 바가 없을 수 없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난처한 느낌을 갖게 했죠. 저는 누군가가 그녀의 침묵을 냉담한 무관심으로 느끼고 노여워할까봐 모임 시간 내내 난처했습니다. 

그녀의 '슬픈 눈'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어떤 구원과도 같았어요. 깊고 순수하게 패배자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아라. 나는 지금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다. 적당히 비판하고, 이 세계와 적당히 타협하는 너희들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녀의 사회적 설정, 이를테면 기자라는 딱딱한 호두껍질이 맥없이 해체되며 한 개인이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을 저는 불안과 구원의 이중적 느낌으로 바라봤어요. 그녀에게 그토록 내부고통에 순응하는 자세를 갖도록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요? 

글을 쓸 때 저는 <나>라는 대명사를 쓰고, 그때 저는 <나>로 대표됩니다. 그러나 제 안에는 <나>로 대표될 수 없는 밤의 검은 강 같은 고요한 흐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도 그녀처럼 <다국적 토요일의 모임>에서 어떤 고통을 느꼈습니다. 모두들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누구나 그런 고통을 안고 있었고, 그러나 방어할 줄 알았으며, 적당히 포기하고 순응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새 멤버는 좀더 투명하게 무방비로 그것에 노출되어 있었던 거에요. 가끔 기이할 정도로  타인의 내면을 잘 느끼는 저는, 은연중에 그녀의 고통을 느끼다가 마침내 그것의 노골적인 면을 감지하고 반가워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 -

그런데 어쩌면 가장 고통받은 사람은 저였는지도 모르겠어요. 5분 뒤에 쓰러질런지도 몰라~ 라는 한심한 몸 상태로 그 자리에 있었고, 모든게 예정대로 흘러갔지만, 혹시 만남이 이상하게 치루어질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그 불안이 또한 구원과도 같았으니 말이에요.
이제 고통의 시간이 지났으니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겁니다. '그 고통 덕분에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가 종이에다 썼던 이 말을 빌려와도 좋겠죠.  "자, 우린 용케도 잘 빠져 나왔다."

그들이 이 글을 읽을 리는 만무하지만, 읽는다면 제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가지만은  빼고요. 그 예외란, 우리가 느꼈던 '고통'이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 글이 될 수 있다는 것! -_-
이 사실을 알면 그들은 실소하거나 의아해 하거나 어쩌면 놀라워할지도 모르겠어요. 모두가 지니고 있지만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을 하나의 주제로 삼는 일은 그러나, 그러므로, 그래서, 의미 있습니다.

덧: 이제 저는 기절하러 침대로 갑니다. 정말 힘든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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