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프랑스 영화 잡담 댓글에 고딩 때 쓴 [히로시마 내 사랑] 감상문을 어머니에게 받아 올려보겠다 했는데요.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해 놓아서 지금은 읽을 수가 없다는군요. - - 하지만 전작인 이 짧은 감상문 낙서는 가지고 계시다고 보내주셨습니다.
"<히로시마 내 사랑>를 봤다. 남자 주인공이 한 대사가 인상깊었는데, "바깥에서 온 사람의 감각에는 허락되는 것과 허락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발언이었다. 모든 것을 본다고 해도 보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인 듯한데, 맞는 말이다. 허락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본다는 것은 재현된 것을 넘어서 재현되지 않은 것과 함께 한다는 것이니까.
메를로-퐁티가 “보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즉 본다는 것은 곧 신체가 그 체험의 영역에 개입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 히지카타 타쓰미가 죽음의 심연에서 마치 타버린 신체를 일으켜 세우는 그 섬광 같은 한 순간?
그 장면을 보면, "우리는 순간을 함께 산다"는 식으로 메를로 퐁티와 거의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놀라울 정도로 옳은 말이다. 왜냐하면 신비주의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
# 이렇게 마감해버리기는 아쉬워서 그저께 아버지가 알랑 레네와 나눴다는 대화들을 생각나는대로 기록해봅니다. (요런 건 적어두지 않으면 금방 까묵해버려서.... )
아버지: 누벨 바그가 프랑스 영화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다들 인정하는 분위긴데 어떤 점에서 그렇다는 건가?
레네 : 영화제작에 대한 관념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감독이 되자면 십년 정도 조감독 생활을 하며 영화제작을 배워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빨라야 40세 보통은 50세가 되어야 감독이 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에 젊은 감독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연출이나 편집에 무슨 법칙이 있는가라며.
아버지: 누벨바그는 50년대 말까지 전성기였다가 지나가는 유행처럼 신선함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레네: 나는 현재의 영화나 옛영화나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의 것이든 영화 자체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없고 관객들이 들쑥날쑥할 뿐이다.
아버지: [히로시마 내 사랑]은 당시에 혁명적인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그 이후로 나온 영화 중 당신이 혁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레네: 우선 [히로시마 내 사랑]이 혁명적이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요즘 문제작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없다.
애릭로메르, 트뤼포, 고다르, 알렝레네, 브레송, 장비고. 어린 시절 저에게 BTS였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