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가 들면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자기가 오랫동안 절대적 원칙, 신념으로 삼고 있던 것도 점차 무너지는 게 당연하죠.

재작년인가 십몇년 만에 만난 어떤 누님에게 '너도 나이를 먹었구나. 예전에는 래디컬한 게 매력이었는데'라면서 반쯤 아쉬워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저기서 래디컬이란 말은 정치적 입장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때 제 나이가 벌써 삼십대중반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약화되고 부드러워지기는 하더라도 고등학교에서 대학 1,2학년때 굳어진 생각은 꽤 끈질기게 남아있게 마련이죠. 일단 젊은 나이에 머릿속에 독트린의 형식으로 수립된 것은 나중에 현실을 알아가고 더 다양한 지식과 관점을 얻으면서 그 한계를 자각하게 되고 그 원칙에 대해 회의를 하게 되더라도 송두리째 뒤엎고 포기하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예컨대 아래에 다른 글을 적다가 쓴 말인데

"우리 거(약탈당한 문화재)니까 무조건 돌려줘"라는 말에는 무의식적 거부감이 있거든요.

백만 광년 차이가 있는 건 알지만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이 생각나거든요.

제대로 말하면 더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거죠.

당연히 저런 거부감은 10대후반에 만들어진 것이고요.


그러니까 프랑스애들을 문화 제국주의자라고 실컷 얘기하고 나서 스스로 뭔가 찔러셔 이런 식*** 첨언하면 저는 사실 저 책들이 한국에 돌아오든 말든 상관 안 합니다. 일선의 역사 연구자들의 감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사본을 떴다면 원본이 어디에 있든 엄청 중요한 것도 아니고 겨우 백년밖에 안 된 일이긴 하지만 무조건 '우리 거니까 돌려줘'라고 하는 건 별로 동의를 못 하거든요. 제가 짜증나는 건 고속철, 공염불이 된 약속, 거기에 아무 대응도 못한 한국 정부, 무엇보다 자칭 지식인이라면서 그걸 떳떳하게 여기며 적반하장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저놈의 제국주의자들이죠. ***의 사족을 굳이 달아야 마음이 편한 거죠.


(당연히 저런 식의 거부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쉽게 안 변하는 신념에 관한 예를 들려한 것뿐이죠.)





경기를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홍명보 감독이 (아시안 게임 3-4위전) 경기 시작 전 선수들에게 "우리는 그동안 병역특례 하나만 보고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이는 연평도에서 돌아가신 장병들께 너무 염치없는 행동이다. 오늘은 그러지 말자"고 얘기했다는 기사를 잃고 괜히 울컥하더군요.

근데 울컥하는 동시에 그 감정에 대한 자기검열이 뇌에서 이뤄지죠.^^

'이봐, 정말 늙었구나. 너도 이제 완전히 내셔널리스트가 된 거야?'하면서요.




그러면서 생각난 게 고3때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쉬려고 읽은 '티보가 사람들'이었습니다.(생각해 보면 고3때 가장 많은 소설을 읽었네요. 최수철의 '무정부주의자의 하루'도 그때 접했고.) 일곱 권으로 된 것인데 당시 읽을 때는 몇년 동안 마지막 권이 나오지 않아 결국 끝을 못 봤죠. 한참 뒤에 오롯이 전체가 출간된 건 확인했지만 별로 생각이 안 나더군요.


'티보가 사람들'은 사실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작품은 아니죠. 비슷한 시기에 그 상을 타지 못한 숱한 괴물들을 생각해 보면 특히 그렇고요.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은 '명백히 정치적인 이유에서' 문학상을 받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티보가 사람들의 후반부인 '1914년 여름'의 중심 테마는 1차대전 직전 '혁명가들'의 고뇌입니다.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 기억이 정확치 않습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상황이 얼마나 역사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전 발발 직전 각종 극좌파 혁명가들(작품은 스위스의 모 도시에 망명해있는 혁명가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아나키스트였던가요?), 각국의 노조들은 이 전쟁이 자본가와 내셔널리즘을 위한 것이고 전쟁이 터지면 전선에 끌려나갈 노동자들만이 희생될 것이라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면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총파업으로 전쟁을 저지하려 하죠.


하지만 전쟁이 점점 불가피해지면서 노조, 좌파 지도자들은 흔들리고 결국 전쟁 직전 대부분 '애국주의'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가장 극렬세력이라 할 스위스의 망명객들마저 일단 전쟁이 터지자 흔들림이 감지되죠.

그러던 중 망명중이던 혁명가 하나가, 그러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투철한 혁명가 하나가  조국으로 떠납니다. (꽤 중요한 인물이었던듯)

바보같은 내셔널리즘이 일으킨 전쟁인 건 뻔히 알지만 비겁한 병역기피자가 되느니 입국 즉시 체포되어 총살당할 가능성이 훨씬 많지만  만의 하나 전선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요.




제가 군국주의, 내셔널리즘에 관해 (아직까지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쉽게 버리지 못할 듯한) 어떤 완고한 신념 -- 홍명보 기사를 읽으면서 울컥할 때 자기검열을 자동적으로 해버리는 버릇, 그 한계와 부분적 허구성을 충분히 알면서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어떤 원칙 -- 을 갖게된 것은 사회과학, 역사철학, 근현대사의 공부가 아니라 (저 그런 공부 안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 때문이었거든요. 물론 성장기 동안 한국의 군사독재에 대해 오랫동안 피부로 염증이 난 게 핵심이겠습니다만.


근데 몇년 전부터는 그 조국으로 떠나는 바보같은 혁명가의 마음이 슬쩍 이해도 되더군요.

알아요. 바보같은 거. 근데 쪼금~ 이해가 된다고요.^^

(물론 전쟁 나면 도망가겠지만... 뭐 예비군도 끝난지 오래이고~~ 민방위를 누가 신경쓰랴~)

반전주의가 그냥 존레논 노래에나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건 당연히 더 오래 되었고요.




그밖에도 이런 식으로 약화되거나 반쯤 허물어진 '원론적이어서 아름다웠던' 신념은 많죠. 

(PC란 말을 알기도 전에 누구보다 투철하게 PC했지만 어느덧 스스로 전혀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있으니...)

아직도 대부분은 그놈의 원론적 차원에서는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p.s. 오늘 프랑스 처자랑 크레이프를 먹다가 연평도 사건 얘기가 삼천포로 샜습니다. '프랑스가 해군은 엉망이지'라는 말에 서로 동의하고나서(항시 고장수리중인 모 항공모함~~) 제가 '프랑스는 지난 백여년을 보면 육군도 별로 아니야?'라고 했더니 A양은 바로 '1차대전은 우리가 이겼거든'이라고 맞받아치더군요.^^ 저는 보불전쟁, 2차대전, 인도차이나 전쟁만 생각했는데 말이죠.~~ 프랑스가 이겼다고 하기는 좀 그런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치 않아 그냥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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