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미술 300년전 관람 후기

2013.04.01 13:00

칼리토 조회 수:3587

블로그에 적어둔 걸 퍼온 것인지라 말투가 반말입니다. 말 짧은 거 싫어하시는 분들은... 그냥 건너뛰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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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미국미술 300년전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돈 드는 전시회에는 왠지 발걸음이 안떨어지는 이상한 짠돌이 정신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다가 독지가(!)의 표 후원으로 다녀왔다. 후원해주신 부산 사하구 삼성내과 서원장님께 감사를!!

 

 

말하지 않아도 꽃을 보면 봄이 온게 느껴진다.

 

 

 

전시회를 멀리서부터 홍보하고 있는 저 대형 걸개그림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이다. 붉은색과 노란색 줄무늬라는 이름의.

 

 

 

들어가기전에 왠 사진을 이렇게 찍나 했더니..

 

 

평일에 이렇게 줄을 설정도로 인기가 대박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설정샷인듯. 사진 한장 찍고 우르르 들어가버렸다.

 

 

사무실 후배 하나를 꼬드겨서 같이 갔는데.. 나는 초대권, 그는 입장권. 보고나서 술은 내가 샀다. 예술적 감흥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술을 마셔도 안 취하더라. 이미 취해있어서 안 취하는 것 처럼 느낀 것인지도.

 

 

전시회의 시작은 초상화부터.. 인물을 정형화된 포즈로 묘사하는 초상화는 유럽의 그것과 똑같다.

 

 

존 싱글턴 코폴리는 초상화를 정묘하게 그린 화가로 유명한데 옷의 질감이라던가 눈의 표정 묘사가 굉장히 디테일하더라.

 

 

역시 코폴리의 여인이라는 그림인데 옷과 소파의 묘사와는 별개로 아무리 봐도 여인이 아니라 남자같은 언밸런스함이 눈길을 끈다. 심지어 요즘의 배우를 닮았는데 이름은 생각이 안난다. 크로스드레서라는 제목이면 어떨까 했다.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의 흉상. 이렇게 생긴 사람이로구나.

 

 

 

 

맥유인가의 자매를 그린 그림인데 작가는 토마스 설리라는 사람이다. 담소를 나누는 젊은 자매의 아름다움이 화폭에 그대로 정지해 있는 느낌이다. 목덜미가 보이는 우아함과 정면을 응시하는 당당함이 조화로운데 여유있고 아름다운 귀족 가문의 영애들을 매력적으로 묘사한 느낌. 배경에 있는 꽃은 젊음과 아름다움, 자매의 우애를 상징한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자연 풍광을 묘사한 그림들은 이발소 그림 같은 느낌이지만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보고 있으면 사진이 없던 시절, 인간이 받을 수 있었던 순간적인 감동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목동이라는 이름의 이 그림은 눈쌓인 겨울밤, 홀로 가축을 돌보는 원주민 소년이 화면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보기만해도 쓸쓸하고 추운 느낌이다.

 

 

하지만 한 발 다가가면 소년은 졸린듯 잠이 덜깬 눈을 하고 앉아있다. 어딘가 쓸쓸하다기보다는 현실을 체념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그걸 받아들이려는듯한 느낌이랄까. 고즈넉하고 한가한 눈쌓인 겨울밤과 어울려 마치 크리스마스 전날 밤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그림은 미국의 풍경을 묘사한 다른 그림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 찍어뒀다. 기존의 그림들이 자연 풍경을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려진데 비해 이 그림에서는 파스텔톤에 가까운 색감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빛이 충만한 순간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가까이서 보면 거친 나이프 터치가 느껴지고 색감 또한 오묘하다.

 

 

 

 

캣츠킬산의 10월이라는 이 그림에서는 광원과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을날의 황금빛 광선 묘사가 탁월하다. 보고만 있어도 가을이 방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오는 그런 느낌.

 

 

이 그림도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 끈다. 토기를 만들고 있는 원주민을 그린 이 그림에서 잉거 어빙 쿠스가 어떤 의도를 가졌던간에 보는 순간의 느낌은 따뜻함이다. 불가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원주민은 불이 주는 따뜻함에 둘러 싸인듯 보이고..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순간에 몰입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피부는 피부가 아니라 마치 모피를 한겹 둘러싼 느낌이다. 불이 주는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거칠지만 섬세하고 색다르게 표현하면서도 작가는 도기 제작에 몰입하는 원주민의 표정까지 잘 잡아내고 있어 이 그림은 서재나 공방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다.

 

 

남부의 연애라는 이 작품은 작업을 걸려고 하는 껄렁한 남자와 예쁘장하지만 새침한 아가씨가 눈길을 끌고

 

 

해안에서 해안으로라는 이 작품은 마치 영화의 한장면 같다. 왼쪽에 앉은 턱 괸 신사는 셜록 홈즈같고.

 

 

어린 수리공이라는 이 작품에서는 어린이라는 말이 없었던 과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리꼬지말라고 악동 뮤지션이 외친 이후로 성장판 닫힐까봐 전국의 청소년들은 다리를 꼬지 않지만 기술이 있어서 어른들이랑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이 어린 녀석은  거기에 아랑곳없이 도도하고 시크하게 다리를 꼬고 있다.

 

 

소년의 옷은 허름하고 맨발은 초라하지만 가진 기술이 있어서인지 표정만큼은 도도하고 자신감이 가득하다. 역시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막의 노동자들이라는 이 그림을 보면 작열하는 열사의 사막에 내리쬐는 타오르는 태양이 느껴진다. 마치 모든 것을 표백해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

 

 

 

 

미국의 역사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연표가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참 역사가 짧은 나라. 하지만 무서운 나라.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나라이기에 가구들에도 귀족 취향이 가득하다.

 

 

그리스 노예라는 조각과 풍경이 담긴 디저트 접시. 이런 접시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아줌마들의 꿈이다. 

 

 

마치 사진으로 찍어놓은듯한 사실적인 정물화앞에서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런 정물화에는 담겨진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라는데.. 읽어낼 도리가 없다.

 

 

 

이 그림은 트롱프뢰유라고 마치 진짜같은 느낌을 주도록 만든 그런 그림이라는데 논속임을 통한 유희를 목적으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생각만큼 진짜같지는 않았다. 참고로 트롱프뢰유의 시조는 벽에 그린 그림에 참새들이 와서 자살을 했다는 신라 시대의 화공 솔거.

 

 

뉴욕의 자정 무렵, 비가 내리는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앞서 산을 그린 풍경화와 색감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창백한 푸른 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내리는 비가 사물의 형채를 희미하게 뭉개놓는다. 차일드 하삼의 1890년대 후반 작품으로 비내리는 자정이라는 이 작품은 프랑스 유학을 통해 인상주의자들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는데 보는 순간 와사등이라는 김광균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균_와사등

 

정경 묘사는 다르지만 회화적인 이미지를 중시했던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를 한때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지니 오묘하도다. 예술의 세계여.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검은색 구성이라는 이 작품은 근래에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숨막히는 뒤태의 원조라고 불러도 될듯하다. 도도한 자세와 표정으로 돌아보는 아치볼드 캠벨 부인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당대에 받아들여지기에는 좀 파격적인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도하지만 어딘가 유혹하는 분위기의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거부하는듯 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이중성이 느껴진다. 팜므 파탈이라는 단어를 형상화 한듯한 그런 작품. 세세한 인물의 표정 묘사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와 자세로 그 사람을 표현하는듯한 이런 느낌이 아직도 보는 이의 감정에 돌을 던진다.

 

 

장식적인 기교가 돋보이는 티파니의 냅킨 클립

 

 

아트 타일로 장식한 탁상 시계, 존재감이 또렷하다.

 

 

백합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프레드릭 프리스크의 작품인데 전체적으로 모네나 드가같은 인상파 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미술사조에서 영향을 받은 이런 형태의 작품들을 보면 수준은 높지만 어딘가에서 한번 본듯한 느낌이 들어서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작품만 놓고 보자면 화사하니 참 좋다.

 

 

화가가 자신의 여덟살짜리 딸을 모델로 그린 테니스라는 작품이다. 보기에 따라 롤리타 콤플렉스에 바탕한 그림이 아닐까 의심할만도 하지만 부성애로 그린 그림이라니.. 일단 접어두자. 여인이 되기전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빛을 처리하는 수법이 인상적이다. 사진으로 치면 역광으로 찍은듯한 순간인데 오히려 빛이 후광이 되어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순수한 소녀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이 이후로 전시되는 5부와 6부에서는 미국의 근현대 미술을 장식한 작가들의 작품이 벽면을 채우고 있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저작권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값비싼 몸들이라 그러한듯. 마크 로스코,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과 아돌프 고틀립, 잭슨 폴락과 그의 아내인 리 크래스너는 물론이고 이 전시회에서 가장 감동적이라고 할만한 한스 호프만의 푸른 거석(Blue monolith)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사실 미국을 대표하는 여류 화가이기도 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볼 기대를 하고 갔는데 오히려 그전까지는 이름도 모르던 한스 호프만의 작품에서 감동을 받아 버렸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이런 사진의 색조와 비슷한 느낌과 질감을 2차원의 평면인 캔버스위에 표현한 푸른 거석은 컴퓨터 화면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작품이다.

 

 

 

언뜻 미술을 모르는 아이들의 장난같기도 한 이 작품은 실제로 보면 높이가 1.83미터 폭이 1.53미터에 달하는 사람의 키를 넘어서는 대작이다. 마치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저 터치의 질감을 내기 위해 사용된 것은 대걸레가 아닐까 싶다. 마치 동양화의 담채 기법을 활용한 듯 터치에 따라 달라지는 색의 농담으로 작가는 평면에 입체감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고 스스로의 상념에 빠져들게 하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조지아 오키프의 분홍장미가 있는 말의 두개골의 배경에 쓰인 파란색과 거의 비슷한 색감이지만 다채로운 농담은 작품에 율동감을 부여하는 느낌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오래 오래 바라보고 있어도 좋았을 그런 작품. 이 작품 하나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입장료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강의 감상을 마치고 돌아왔다. 훑어보고 오느라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미국 미술의 핵심은 역시 근, 현대를 관통하는 동시대 미술이 아닐까 싶다. 얼마전에 읽은 폴스키의 책 "나는 앤디워홀을 너무 빨리 팔았다"의 영향인지.. 관련 작가들의 작품을 좀 더 보고 싶은데 조만간 또 기회가 있겠지.

 

눈이 호강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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