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죽마고우 모임이 있었습니다. 남자애 하나, 여자애 하나. 남자애와는 올해로 딱 20년지기, 여자애는 12년지기.

관계가 유지된 햇수를 세는 건 만나 떠들 때 '우와아아 우리가 벌써 그렇게 됐어, 진짜아아?' 이런 식의 과장된 리액션

할 때나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이 친구들을 만나니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매우, 좋았습니다. 집에 다녀온 느낌이었죠.

 

  지난 겨울 이 친구들에 관한 글을 게시판에 쓴 적이 있었어요. http://djuna.cine21.com/xe/3315718  이 글의 1번, 2번 친구입니다.

3번 친구는 결혼해서 지방 내려갔고 다음달에 애아빠가 되지요. 

  1번 친구는 얼마 전 행시 2차를 치고 곧바로 여자친구에게 차여 멘붕상태( ..) 띄엄띄엄 3년 주기로 이뤄지는 얘의 연애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켜 봤는데, 늘 차입니다. 연애 참 순정적으로재미없게하는 스타일. 아직도 여자친구한테 종이접기 같은 걸로 

정성스럽게 선물 만들어주고 그러는 애가 있다니깐요. 연애 시작 직후부터 그의 지구는 여친을 중심으로 돌아가므로, 지금 얘는 우주가

무너진 상태인거죠. 애가 뭐 웃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술만 마십니다. 일이 년 전에만 봤더라도 '아 좀! 그런 건 20대 초에 졸업하고 

오라고!!' 이러면서 '해본 언니' 모드로 으르렁딱딱 훈장질+꼰대질 했겠지만 이젠 그냥 빙글빙글 웃으면서 토닥토닥, 해주고 싶더군요.

'너 레알 교회오빠 st임ㅋㅋㅋ 교회든 절이든 다녀라, 거기서 여자 만낰ㅋㅋㅋ'이러면서 2번 친구랑 같이 깔깔낄낄 흠씬 놀려먹으며 술 

안 떨어지게 제깍제깍 시켜줬습니다. 술 들어가니 애가 좀 누그러지는데, 문득 맞은편에 앉은 절 보고 이러더군요.


  "너 근데, 갈수록 아줌마 닮아간다. 아줌마랑 술 마시는 것 같애."


  1번 친구와 저는 서로의 부모님 성함도 아직 외우고 있을 정도니, 대충 서로의 어무니가 이모 정도로 느껴지는, 준 친척,

지금 헤어스타일이 숏컷인데, 머리 자르고 나서 거울 볼 때마다 묘한 겁니다. 아니, 나 왜 이렇게 엄마 닮았지??? 어렸을 땐 전혀, 였는데.

근데 나 우리 엄마 닮은 것 같애, 라고 얘기해도 별로 공감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프나 대학친구들도 엄마를 보긴 했지만 얼굴

기억할 정도로 자주 본 건 아니니까. 근데 1번 친구가 딱, 얘기해 주는데 고러취이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이이? 가 나오데요.

못지 않게 우리 집 자주 들락거리며 엄마 밥 많이 먹었던 2번 친구도 공감합니다. 거기서 시작해, 오랜만에 엄마 이야기를 잔뜩 했어요.

  그러다 1번 친구가 화장실 갔다 들어오는 걸 멀찍이서 보는데 이번엔, 걔 얼굴에서 걔네 아부지가 보이는 겁니다. 얼레, 얜 여태 굳이

따지자면 아줌마 닮은 쪽이었는데 나잇살 좀 붙더니 인상이 바뀌었네?


  "야, 너 아저씨랑 완전 닮았어, 너 들어오는데 조낸 딱."

  "그치, 나 갈수록 아버지 닮아간다는 얘기 많이 들음ㅇㅇㅇㅇ"

  "...슬슬 때가 됐나보다, 집에 갈 때 탈모치료제 사줄게(아저씨는 대모~리)."

  "안그래도 조낸 신경쓰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


  모임은 편안했습니다. 유년시절을 공유했다는 건 특별한 일이더군요. 이 아이들과 모여 앉은 게 2년이 훌쩍 넘었고, 그간 바짝

연락하거나 서로를 궁금해했던 것도 아닌데 별로 되새길 것도 없다 여겼던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추억놀이를 하는 게 즐거웠어요.

저는 제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꽤 많이 변했다, 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저를 낯설어하지 않아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뭐 

딱히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 이런 건 아니지만요. '나의 고갱이는 아직 온전하고, 나는 너무 낡거나 너무 멀리 오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데서 오는 안도라고 할까요. 저는 형제자매도 없고, 이제는 돌아갈 집이 없는데, 아, 이제는 여기를 내 집으로

삼으면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제가 이런 포근하고 좋은 걸 갖고 있다는 걸 한참이나 잊고 있었드랬죠.


  어쨌든 코 닦으며 같이 한국을 빛내는 백명의 위인들 가사를 외우던 애들은 이제 자기들 엄마와 아빠를 닮은 얼굴을 하고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하며 낄낄댔습니다. 오랫동안 떠들고, 신나게 퍼마시고,  정답게 빠이빠이했죠. 삔 무릎 좋아지면, 감자탕

끓여줄게! 약속하고요. 제가 혼자 살림하고 음식 만들어 먹는 게 얼마나 어메이징한 일인지 걔들이 제일 잘 아니까, 맛이 별로 없어도 

즐겁게 먹어치워줄 겁니다.

  우리 얼굴이 변한 건 참 두고두고 신기해요. 전 원래 여자애는 아빠를, 남자애를 엄마를 많이 닮게 마련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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