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를 용서하고, 현재를 수용하고, 미래를 내맡긴다.

 

이게, 제가 도달하기 바라는, 또 그렇게 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결심한, 목표로 하는 내면 수준입니다. 과거를 무조건 용서하면 분노와 수치심과 회한이 사그라질 테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두려움과 집착이 없어지고, 미래를 온전히 내맡기면 공포와 불안이 생기지 않을 테죠. 이런 태도를 완벽하게 체화해내려면 심오한 철학이나 신실한 믿음, 혹은 깊은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런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한 지금의 저에게는 그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2.

 


과거를 용서하는 것. 이것은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고 정확히 같은 삶을 반복했을 것이라는 단순한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가끔 저는 지금의 제 상황을 바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일자리도 없고 가진 돈도 없고 변변한 커리어와 쌓아놓은 스펙도 없어서 객관적, 확률적으로 볼 때 미래 역시 지극히 암울할 가능성이 큰 지금의 제 모습이요. 과거 정신없이 무언가를 향해 달리던 그 시절, 그 무언가가 제가 진정 바라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으면서도 레일에 올라선 이상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그것 이외의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 그토록 바랐던 '잠시 멈춰 쉬면서 나에 대해 또 앞으로의 길에 대해 바닥부터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라는 꿈을, 이상하고 끔찍한 형태기는 하지만 결국 이루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객관적으로 좋지 않은 지금 상황 때문에 지독한 자괴감에 시달리다가도, 그 마음 아래 '그런데 사실, 난 지금이 좋아..'하는 만족감이 슬며시 올라왔다 사라지곤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저는 아주 간절히 원했던 극소수의 어떤 것들은 괴상한 형태로나마 꼭 현실화시켜왔죠.

 


제가 저 자신에 대해 투명한 사람이었다면, 지하감옥에 억지로 쳐넣은 자아의 조각들이 없고, 그 빈자리를 대신하여 기만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자기들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제 내면을 정직하게 투명하게 직시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저는 남들이 환호하는 조건을 과감히 포기하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해 달리는 그런 용감한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시 저는 진짜 자아의 조각들은 무의식에 몰아넣고 거짓된 자아에 휘둘리며 기만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저는, 스스로에게 온갖 종류의 거짓말을 해대고 있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어떤 진실을 알고 있으며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똑바로 바라볼 용기도, 의지도,  능력도 없었어요. 그런 내면 상태에서, 과거의 저는 과거의 제가 이미 했던, 그런 선택 이외의 것은 할 수 없었을 거에요. 저는, 제가 가진 끔찍한 내면의 조건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해 왔어요. 그렇기에 과거 제 삶의 궤적은 당시의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지였다는 것을, 과거를 돌아볼수록 점점 더 확신하게 되어요.  설혹 너그러운 신이 기회를 주셔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 제가 가졌던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저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에요. 그렇기에, 저는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는데...'하는 후회를 할 필요가 없어요. 그 당시 저에게,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으니까. 과거의 그 조건 속에서는 저는 정말 최선을 다 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아주 큰 대가를 치르고 난 후에야, 제 가짜 자아들을 하나 둘 소멸시키고 어둠 속의 진짜 자아들을 해방시키는 길을, 그리하여 나 자신에게 좀 더 정직해지고 투명해지는 길을 가기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상담 와중 과거에 대한 후회에 젖어 있는 저를 향해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밤낮을 바꾸지 않고 제시간에 잠을 제대로 잤더라면. 운동을 꾸준히 했더라면. 빵 과자 같은 불량식품 덜 먹고 밥 꼬박꼬박 챙겨 먹었더라면, 자기관리를 깔끔하게 잘했더라면, 정말 우울증에 안 걸렸을 것 같아요?' 꽤 오랜 시간 병의 파고를 넘나들면서 어느 정도 감이 생긴 저는 단박에 알 수 있었죠. '아니요. 어떤 짓을 했더라도, 결국 우울증이 생겼을 거에요.'  선생님이 그러셨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본인이 뭘 하든 상관없이 결국 우울증이 생겼을 거에요.'  제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결국 생길 일은 생기게 되어 있다는 것. 모든 소소한 원인들을 넘어서는 거대한 그 원인이 타고난 유전자인지, 집안 조건과 양육환경인지, 당시 상황인지, 저도 선생님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둘 다 동의했던 것은, 무언가가 정해져 있었다는 거에요. 당시 저는 손을 댈 수 없었던 무언가에 의해, 저는 우울증을 겪게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또 발병 초기에 일찍 병원을 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우울증이라는 병명도 제대로 모르던 당시 저의 지식수준이나 산산이 조각난 자아들을 끌어안은 채 겨우 서 있는 게 고작이었던 미천한 자기 객관화 수준이나 정신과 질병에 대한 정보도 변변하게 없었고 편견은 극심했던 주변 환경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 상황과 조건 하에서, 저는 그런 식으로 병을 겪고 치러 낼 수밖에 없었고, 그 속에서 전 정말 최선을 다 했어요. 살아남았거든요.

 


가끔 정말 재수 없는 우연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들이 삶을 덮쳐요. IMF, 수차례 세계발 금융위기, 어마어마한 자연재해, 또 국지적으로는 어떤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놓은 소규모의 파국, 더 작게는 가까운 친족들에게 일어난 각종 파탄들. 저에게는 단지 악운들일 뿐이었지만, 그 일들 역시 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 결과를 생성해낼 수밖에 없었던 원인들이 어우러진 조건 속에 생성된, 필연적인 결과였을 거에요. 간혹 그 중 어떤 것, 예를 들어 IMF 사태의 생성과정들은 저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해한다 한 들, 그것들이 생성되는 과정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너무 미미해서 그 결과에는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동일해요. 그렇게 생긴 일들이 왜 하필 그 일이 유독 그 때 나를 덮쳤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그렇게 그 사건들은 발생했고, 저를 때렸죠.

 

그리고 저는 그 일들에 대해, 그때 제가 가진 내적, 외적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는 형태로 반응했지요. 그리고 그 '반응'이, 다시 저를, 제 삶을 만들어갔어요. 그때 그 반응 말고 또 다른 식으로 반응할 수 있었을까. 정직하게 자문해보면, '아니다.'에요. 당시 우연처럼 보이는 하지만 분명히 필연이었을 일들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인과의 사슬을 타고 저에게 닥쳤고, 그에 대한 제 반응 역시 제가 가진 조건 내에서 필연적이었어요. 그렇기에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저에게 최선이었어요. 그 외에는 없었으니까.

 


과거에, '가정'은 없죠. '그것 이외의 다른 선택을 했야 했다'는 후회는, 절대 불가능한 것을 분명 가능했다 기만하는 거짓말일 뿐이죠. 이 거짓말이 무지에서 나왔든, 악의에서 나왔든, 거짓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그 당시의 내가 그 때의 나인 한, 필연적으로 선택하게 될 선택지는 단 하나였고, 바로 그것을 택했으며, 그렇기에 그것은 최선의 것. 그렇게 이어진 무수한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지금의 내 모습은 바로 내가 선택한 결과물, 그렇기에 다 나의 책임인 것. 혹여 내가 손댈 수 없었던 원인 혹은 우리가 악운 (가끔은 행운)이라 부르는 것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사건의 발생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면,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고, 그렇기에 나의 책임도 아니며, 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닌 것. 그 일은 그저 단지 나에게 일어난 일. 그저 그뿐. 그리고 그 일에 대한 반응 역시,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으며, 그렇기에 나에게 최선의 길이었다는 것.

 

 

 

 

 


3.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후회도, 비난도, 자책도, 또 분노도, 결국 필요 없죠. 혹여 이 감정들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과거가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일어난 일들과, 내가 내린 유일하며 최선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확신하지 못하거나, 단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싶기 때문이겠죠.

 

 과거가 유일하며 최선의, 완벽한 길이었다는 사실, 인과의 법칙이라고, 혹은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하는 이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는 아주 긴 시간이 걸릴 테지요. 그리고 그 깨우침을 기다리는 동안 저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책과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현재를 저주하고 거부하며 미래를 두려워하며 계속 삶을 망쳐가겠죠. 과거에 대한 후회와 수치심과 자책과 분노와 증오로 지금까지 제 삶을 망쳤던 방식 그대로.

 

그렇기에, 저는 과거를 무조건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나의 과거가 유일하고 최선의 것이었다는 것을 머리로나마 이해한 지금부터라도, 저는 제가 저지른 모든 수치스럽고 후회 가득한 일들을, 무조건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과거를 용서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타인이 저에게 가한 모든 일,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저에게 닥쳐왔던 모든 일 또한, 무조건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쉽게 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과거를 완벽하게 수용하고 후회하지도 증오를 품지도 않는 태도를, 어떤 이들은 이미 갖추고 있더군요. 그들이 언제나 완벽한 선택을 하고 흠잡을 데 없는 과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뿐이었어요. 그래서 그 기만적 가정에 기반을 둔 후회, 수치, 자학, 분노, 증오 같은 질척거리고 쓸모없는 감정 없이 과거의 시행착오에서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현재에 사용하는데 온 에너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일 뿐이죠. 이런 이들이 이미 존재하기에, 저 또한 꾸준한 연습을 하면 그들에 가까워질 수 있겠죠.

 

저는 무조건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같은 가정은 거짓이기에. 내가 선택한 과거는 그 당시 조건 속에서 필연적이고 따라서 유일하며, 최선이라는 것. 또한 타인들도 정확하게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이 나에게 한 일들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어쩌면 그게 (그들에게) 최선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도 타인도 개별적으로 손 댈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재앙들 역시, 그저 일어난 일, 단지 그뿐이라는 것. 그리고 가끔, 아니 꽤 자주, 최악의 재앙이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축복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건 지금 내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제대로 소화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머리로나마 미약하게, 혹은 단편적으로나마 빈약하게 알기 시작한 이상, 이것이 진리라 ‘믿고’, 이 믿음이 현실이 되도록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저지른 모든 일과, 타인들이 저에게 한 모든 일과,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제 과거를 모두 용서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더는 후회도 수치심도 자책도 증오도 분노도 저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노력하기로 했어요.

 

과거를 용서할 것. 무조건, 어떤 것이라도. 과거는 그 자체로 완벽했다는 사실을, 설사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받아들이려 노력할 것. 아니,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것. 이게, 제가 ‘과거’에 대해 내린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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