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운전 6시간을 투자해야 볼 수 있는 거리에 가장 가까운 개봉관이 있어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듀게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틀 전 화요일에 보고 왔습니다. 마침 스케줄이 비고 춥긴 했지만 날씨가 맑아서 운전하기에 상당히 괜찮은 날이었습니다.


화요일 첫 상영은 오후 1 시 정도였는데 도착하니 정오가 막 지난 시간이더군요. 

조용한 극장에 들어가서 표부터 먼저 샀습니다. 그런데 매우 저렴한  $5 !!! 

웬만한 극장에선 $9이나 $10은 줘야하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물어보니 <변호인>을 상영하는 AMC 극장 체인에선

평일 오후 6시 이전 상영하는 모든 영화를 $5이라는 가격에 관람할 수 있다고 합니다. 

AMC 가 없는 동네에 사는지라 AMC를 이용할 수 있는 미국 거주인들이 상당히 부럽더군요. 


남는 시간동안 잠시 근처 한국 슈퍼에 들려서 몇 가지 물건도 사고 요기도 한 뒤에 시간에 맞춰 다시 극장에 들어가니 

환하게 불을 밝힌 상영관 (150-200석쯤 될까요?)에 20명 정도의 관람객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흠칫 놀랬습니다.


평일이고 시간도 대낮이라 관객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30대, 40대, 50대의 한국계 여자분들이 둘씩, 셋씩 짝지어 경사진 윗쪽 좌석을 제법 채우고 있었습니다.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관객들도 삼삼오오 보이더군요. 대부분의 관객이 한국계열로 보였고 비한국계는 한두명 정도 눈에 뜨였습니다.

미국에서 이렇게 한국계 관객들이랑 영화를 보는 것도 처음이라 생경한 느낌마저 들더군요. 


영화 <변호인>이 시작되고 제일 첫 장면에서 버스에 앉아 있는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의 모습을 보니 울컥해지더군요. 

그 시절에 대한 제 아련한 기억과 더불어 송변의 모델에  된 분이 영화 시작부터 송강호 배우에 겹쳐 보이면서 무난하기 짝이 없는 장면에서부터 감정이 요동치더군요. 

하지만 곧 감정을 가라앉히고 대체로 담담한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간혹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걱정했던 만큼 펑펑 울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제 감정을 잘 다스렸다기 보다는 영화 자체가 눈물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요소가 굉장히 많지만 그것을 잘 자제해서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 

그거야 말로 영화 <변호인>이 가진 미덕 중 최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변호인>에 대해서 나름 객관적인 평을 하자면 두드러지는 결점 없이 우직하게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 할 줄 아는 노련한 감독이 매끈하고 날렵하게 뽑은 영화가 절대 아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투박함이 오히려 영화의 개성과 장점이 된 작품이었습니다. 


투박함, 우직함에 하나 더하자면 "오바하지 않는다"라는 게 이 영화의 또다른 미덕이었습니다.

"오바하지 않는다"는 것은 배우들의, 특히 조연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오달수, 송영창 등의 조연 전문(?) 배우들은 약간 오바하는 코믹 이미지가 숱한 영화에서 지나치게 남용된 듯 해서 

스크린에서 보는게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는데 <변호인>에서 그들은 자신의 연기를 철저하게 자제하고 컨트롤합니다.

덕분에 그들의 익숙한 이미지는 거의 지워지고 그들이 맡은 캐릭이 캐릭 자체로서 잘 살아나면서도 다른 배우들과 장면 장면에 잘 녹아나더군요. 

그 누구도 "이 장면은 내 거야" 라고 오바하지 않아서 한 장면을 생각하면 그 장면에 나타난 여러 캐릭이 동시에 떠오르는, 

당연하지만 드문 영화보기 체험을 했습니다.

 

국밥집 아즈매역의 김영애, 국밥집 아들 임시완, 송변의 아내역을 맡은 이항나, 송변의 고교동창 기자역의 이성민, 공안검사역의 조민기 등등

다들 자기가 맡은 역을 오바하지 않으면서도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최고의 앙상블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차동영 고문 경찰역의 곽도원은 묵직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꾹꾹 눌러담은 듯한 악역을 멋지게 해치우더군요. 


주연을 맡은 송강호에 대해서도 "오바하지 않는 미덕"은 적용됩니다.

주인공 송변을 맡은 송강호는 많은 대박 영화들에 출연했고 반복되는 익숙한 연기 패턴이 있습니다. 

일종의 매너리즘일 수도 있는데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자신의 매너리즘을 적어도 80% 이상은 싹 지워버리는데 성공한 듯 합니다.

그리고 역할과 장면 자체를 뛰어넘는 지나친 오바 연기는 자제합니다. 

법정 장면에서 "국가는 바로 국민이다"를 외치는 폭발적인 장면은 그 이전 장면들에 보여줬던 생활인으로서의 담담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소름끼치는 폭발력을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배우들의 절제된 앙상블 연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느라 영화의 다른 장점을 무시할 순 없지요. 

눈에 가장 띄었던 것은 70-80년대를 섬세하게 살린 배경과 셋트, 소품들이었습니다. 

단 한번의 관람이라서 하나하나 뜯어보지 못했지만 다시 DVD로 보게 되면 배경을 꼼꼼히 보면서 추억에 잠겨 음미할 생각입니다.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심장을 뜨끔하게 만든 장면을 몇몇 꼽으라면 

그 첫번째는 송변과 국밥집 아즈매가 2달 정도 불법감금으로 고문을 당한 진우를 접견할 때 진우의 상체가 드러날 때입니다. 

임시완의 소년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여린 몸뚱아리를 뒤덮은 퍼런 멍자국은 그 어떤 연기보다도 군사독재 시대의 무자비한 폭력, 아픔과 분노를 생생히 되살려 주더군요. 


고문 경찰이었던 곽도원이 송변에게 발길질을 하다 말고 오후 5시의 국기 하강식 소리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장면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일제시대, 6.25,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를 거쳐서 성장한, 반공주의와 군사체계에 철저히 길들여진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일면을 본 듯 했습니다. 


송변의 경우 법정에서의 명장면도 많았지만  저에게 법정 장면보다도 훨씬 울림이 컸던 장면은 

결정적인 증인이었던 군의관의 증인자격을 부당하게 빼앗기는 바람에 

법정에서 패한 송변이 국밥집에서 묵묵히 국밥을 꾹꾹 떠먹던 장면입니다. 


송변의 활약으로 형량 조절에서 유리하게 되었다고 내심 자축하는 동료 변호사들에 둘러싸인 채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국밥을 입에 넘는 송변의 모습에서 송변이 부림사건을 모델로 한 그 재판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의 울림이 너무 커서 뒤에 따라 나오던 송변의 87년 거리투쟁,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서있던 장면은 일종의 사족같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3시간 동안 송변의 어떤 점이 돈만 아는 속물 세무 전문 변호사를 인권 변호사, 민주 투사로 바꿨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시대가 송변을 바뀌게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송변은 애초에 어떤 사람이길래 시대의 요청에 안락한 부귀영화의 삶을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요?


송변을 모델로 했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제 개인적인 정보나 인식은 무시하고 영화 <변호인>이 주는 정보에 의존해서 송변 캐릭터를 분석하자면


송변은 지위에 따른 허세가 없고 자신에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작은 은인이기도 한 국밥집 아즈매의 애절한 요청이 마음에 걸려 밤 늦게까지 집 앞에서 아즈매를 기다릴 줄 아는 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잔꾀 부리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우가 읽었다는 불온서적(?)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밤새워 읽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직접 알고 헌법과 형법을 정확히 기억하고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일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힘들게 본 영화였지만 제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전혀 아깝지 않은 훌륭한 영화였습니다. 

극장에서 다시 재관람하고 싶은데 그것은 좀 무리이니 DVD가 출시되면 꼭 구입해서 다시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대충 봐서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던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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