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마치,가 너무 많아

2015.10.30 23:15

푸른나무 조회 수:1386

며칠새 더 추워졌네요. 코코아 마시면서 침대 이불 안에 뜨거운 물을 채운 탕파를 집어넣고 그 위에 발을 올려놓고는 책을 읽어요. 그런데 문장마다 심어져 있는 마치, 때문에 괴로워요. 마치 ~같이...의 그 마치요. 여러 번 나와요. 한 문단에 마치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이상하지 않아요? 한번 나왔으면 같은 문장 내에서나 바로 뒤 문장에선 그냥 ~같이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그게 거슬려서 몇 페이지를 못 읽겠어요. 번역에 민감하지 않은 편인데 이 너무 많은 마치, 는 어느 책, 어느 문장에서나 툭 튀어서 전체 리듬을 해칩니다...



마치를 동원해서 ~같다, 라고 쓰는 편이 나을 때도 있죠. 단조롭거나 삭막한 곳에서 낯선 시간, 세계를 끌어들일 때..... 있지 않거나, 가능하지 않거나,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들을 부드럽게 잇고 잠시 존재하게 할 때.. 세밀하고 더 풍부한 세계를 그렇게 그려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어떤 마치는 와닿지 않고, 어떤 마치는 답답하고, 어떤 마치는 에둘러 하고 싶은 말을 숨기는 듯 비겁해보이고... 그저 남발되는 마치는 군더더기 같아서 매끄럽지 않아요. 언어는 섬세하고 예민한 사용이 가능하니까요.


학교 다닐 때 운 좋게도 대부분의 국어선생님은 훌륭했는데(반대로 내가 만난 대부분의 수학선생님은 무능해서 저를 더 수학에서 멀어지게 했고 중학교 들어간 이후로 수학 수업은 들어본 기억이 없네요) 특이하게 기억하는 선생님 한 분이 있어요. 종종 생각하곤 해요. 세상에 재미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싶을 때나 사는게 심심해질 때면...... 문법 시간이었고 고2였나 고3 즈음이었는데.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였고 인근의 대학에도 출강하고 있었고 원칙주의자이고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몹시도 불운한 사람이기도 해서 첫 수업 시간에만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면서 그 인생의 불운이라든지, 왜 자기가 사랑한 사람은 자기를 배신하는지 물색 없이 학생들을 앞에 놓고는 구구절절 읊어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완고하고도 괴팍하게 자기 방식을 우리에게 강요해서 수업할 것을 미리 말했어요. 첫 수업은 그런 불운한 자기 인생에 더해 왜 한글은 아름다운지 등을 설명하는 말이 이어졌는데 그런 것들을 우리가 모조리, 아주 정자체로(이상한 글자로 말고, o이나 ㅁ을 정자체로 또박또박 쓸 것을, 아주 교과서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낼 것을 요구하는 식이었죠) 베끼기를 강요했고 수업시간에 쑥덕쑥덕대거나 하는 짓 금지, 아무튼 입시에는 걸맞지 않은 이상한 시대의 이상한 국어 문법 시간을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선생님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 수업은 완고하고 포기를 모르는 괴팍주의자인 선생 덕분에 머리 다 큰 아이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고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흥미 없고 지겹기만 한 수업이었겠지만, o을 교과서 필기체로 정확히 베껴쓰고 수업 시간에 요지부동으로 앉아서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내용이 충실했어요. 대강이라든지, 대충이라든지, 무능이라든지 그런 건 없었어요. 재미있었다고 기억합니다. 거기에는 질서가, 체계가 있었죠. 문법이라는게 그런 거잖아요. 무엇보다 아주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주 오랫동안 국어를 가르쳐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괴팍하고 여전히 저렇게 완고하게 원칙적일 수 있다니, 세상에.. 감탄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나 많은 배신을 겪어온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불운한 것도 믿겨지는 것이 세련이라든가, 포기라든가, 그런 것은 할 줄도 모르니 그냥 나는 왜 불운하고 왜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다 나를 배반하는가, 한탄하는 것만이 정직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진무구한 사람 같았어요.


그렇지만 역시 입시와는 동떨어지면서도 이상하게 충실한 수업이라서.........중간고사는 결국 평균이 50도 안되는 극악한 성적이 반마다 나올 수밖에 없었고.. (중요치 않지만 저는 별 무리 없이 백점 만점을 유일하게 받고는 불려나가서 문제집을 선물받는 경험을 했어요.) 저는 그 선생님이 아주 좋았지만, 원성이 자자한 이유도 이해했습니다. 세상에 o을 내 맘대로 못 쓰게 하다니, 그걸 검사하다니, 그것도 고등학교에서 말이죠. 그 수업은 딱 한 학기로 끝났어요. 그런데 제가 사실은 그 선생님이 좋았다고 당시 다른 반이던 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친구가 '나도'라고 작게 덧붙였습니다. 신기했어요. 전혀 생각지 않은 맞장구였거든요.


괴팍하고 광기가 좀 있었죠. 강압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대했지만 그 외 학생들을 모욕하거나 자기 시간 이외엔 폭력적이지 않았고 대충 수업을 때우려는 것 같지도 않았고 사실은 마음이 약하고 점잖았어요. 고등학교 수업에는 안 어울리는 할아버지 선생님이어서 인상깊었죠. 요즘의 국어교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생의 젊은 시대는 어땠는지, 그 시절 교사로 살아가는 건 어땠는지 가끔 묻고 싶어져요. 네, 심심하고 그저 좀 울적해서 쓰는 글입니다. 정작 그 선생 어디가 좋았다는 거냐고 이해 못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문과를 나와서 꼼꼼하게 한 문장, 한 글자를 노려보는, 그러면서 한 편의 글을 길게 만들어가는 일을 과제로, 일로 종종 하는 수밖에 없는데 디테일에 신경을 쓰는 까다롭고 한편으로는 좀 무익한 일이죠. 그렇지만 예민하고 집중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 나름대로 질서정연한. 그 시절 그 선생님은 시간, 장소에 걸맞지 않은 너무 특이한 인물처럼 느껴졌는데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평균적인 사람들만 가득한 것 같은데, 그건 또 제가 너무 사람들을 자세히 보지 않는 까닭이겠죠.






댓글 10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