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에 도전하는 인간의 태도.

2012.06.26 21:22

물긷는달 조회 수:2004

1.

 

금기에 대하여 보거나 듣거나 읽은 많은 인물 중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을 이야기하면서

희미할 대로 희미해져버린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깝네요.

 

성혜랑씨의 '등나무집'을 보면 딸 남옥을 유학보내며 성 씨가 쓴 감상이 있는데,

대강 설명하자면 '제갈공명처럼 현명하고 000처럼 용감한 나의 딸은 떠났다' 식의 묘사였습니다.

 

성에 갇힌 인질과 같이 북한땅에 갇혀 살 운명을 거스르고

말 한마디에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공포의 대상에게 편지를 써 북한을 떠난 남옥의 행동에 어울리는 헌사로,

아, 만약 내게 극복해야 할 금기가 있다면 저런 용기를 내어야 할텐데 하고 감탄했습니다.

 

양귀자씨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작가의도로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여자를 그릴 생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2.

 

단지 두 개의 불명확한 텍스트를 예로 들었지만,

그래도 금기에 도전하는 인간의 삶을 대하는 태도 또는 이미지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 많은 금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도덕이거나 법이거나, 관행이거나 편견이거나-그 모든 류의 사회와 자본이 금지하는 욕망과 사고의 억제 뿐 아니라

매년 1월이면 스스로 다짐하는 수행자적 금기들과, 쉽사리 극복하기 힘든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금기까지

무언가를 해야한다 라는 명제와 무언가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금기를 체화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불편한 상태를 감수해야 합니다.

어떤 금기에 도전한다는 것은 안정과 평화보다는 불안과 소란에 가까운 일이기에

그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매우 고양된 자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명감에 기반했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오만함이나 자기확신, 무모함에 가까운 충동, 기만에 대한 결벽 등이

한낮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날카롭게 존재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자나 이미지로 존재할 때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실제 주변인이라면 자주 거슬릴만한 인간형.

 

만약 어떤 집단이 동기가 무엇이건 단체로 그러한 상태를 유지, 발화시킬 수 있다면 혼돈 또는...혁명이 오겠지요.

때로 금기에 대한 도전은 성적인 면이나 공동체가 인정해 온 권위에 대해서 기존에 합의된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고

당연히 모든 '금기에 대한 도전'이 반드시 공동체나 개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회 진보는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것-금지라는 명령을 금기라는 형태로 내면화 하는것을 거부하는 것-

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는 생각합니다.

 

3.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은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에 의미있는 변화를 도모하는 것일 때

또한 그것이 온전히 나와 우리의 것일 때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사실상 그것이 어떤 지상 낙원이 되었든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금지가 없을 수 없겠지요.

68년도에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했지만 그 말이 실현되어도 한 가지 금지사항은 남으니까요.

 

무슨무슨 컴플렉스니 정신 분석이니 갈 것 없이 어른들이 하는 말로 청개구리 심보라고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일신상의 평안을 구하는 욕구 역시 자연스러운 욕망이기에

어쩌면 금기에 도전한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과의 싸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금기는 공포와 보상과 함께 옵니다.

 

사회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원하지 않는 고통을 연상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강력한 위협으로 다가와 금기에 따르게 합니다.

반면 충실하게, 금지된 것들은 금지된 것들일 뿐이고 권장되는 것들은 권장될만한 것들이라고 따르며 산다면

이승에서건 저승에서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수 많은 사람이나 책들이 속삭입니다.

이런 구조가 가장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반영되는 공동체는 아마 종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종교의 영역을 제외하면, 보상에 대해서는 그 불확실성이나 필요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경우도 많지만

공포는 거의 확실하고 즉각적이고 개인의 삶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형태로

정확하게 말하면 금기는 공포와 함께 온다-보상은 거들 뿐-이라는 게 더 적합하겠습니다.

 

금기에 대한 욕망이나 도전 이전에 금기에 대한 의심이나 인정 조차도 쉽지않은 현실앞에서

개인은 쉽게 무력감을 느끼고 마음과 생활의 위안을 얻는 쪽으로 돌아서기 쉽습니다.

금기를 내면화 하는 한편 마음 구석에 억압과 좌절의 흔적이 변형되어 남아있을지라도요.

 

4.

 

저는 비겁하고 게으른지라 대부분의 금지된 것들은 욕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다만, 생산활동이 가능한 연령일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내가 할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위해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것이 저 자신의 금기에 걸리는 일이라

아무도 금지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소중한 것을 포기당하게 될 것이 두려워,

당장이라도 시작해야 옳은 일임을 알면서도 오로지 저의 속물적인 평안을 위하여

가진 것도 없으면서 가질지도 모르는 것이 탐이 나, 잃을 것이 없어질 때 까지, 라고 내심 변명하며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마치 이 건에 관하여 평생 해야 할 자책의 총 량이 정해져 있기라도 한 양 매일 조금씩 자책하고

그래도 언젠가는 식으로 합리화 하고 불편하게 살고 있는 탓에 오늘 분의 푸념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써 놓았으니 또 기억하는 것처럼 매일 불편해야 결국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겠지요. 범인이 택할 수 있는 고육지책이랄까.

 

언젠가 친구가

타오르는 불처럼 살지말고 남아있는 불씨처럼 살아도 괜찮다며 토닥여 주었는데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부채질 하기 급급한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5.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이 글은 사실 금기라는 주제 빼면 지워진 글과 완전히 별개의 내용입니다만

혹시 이전 글을 지우신 유저 분께 거슬림이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금기'라는 단어를 꺼내주셔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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