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끔찍한 사건을 직면하기가 더 힘들어집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건 압니다. 경험이 쌓일수록 그만큼 더 구체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니까요.

 

청소년들은 역겹거나 괴상한 장면을 보여주면 두뇌에서 호기심 관련 영역이 활성화되는데 어른들은 즉각적으로 회피와 두려움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사이코패스라거나 철면피라는 뜻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다가올 만큼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겁없이 뛰어들 수 있겠고 나이든 사람들이 점점 보수적으로 변할 수도 있겠죠.

   

십대 때, 이십대 중반까지도 민주화 투사들이나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들처럼 고문당해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뭘 몰라서 그랬죠. 이제 저는 제가 고문의 만 나와도 술술 다 불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잘 압니다. 수술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해보고 배고파 보기도 하면서 그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고통이 제 몸에 새겨진 거예요. 게다가 고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아프게 하는 것인지 알게 되면서 묘사를 읽기만 해도 그 고통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아이가 생긴 뒤에는 더 심해졌습니다. 이제는 아이가 고통을 받는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을 보기도 괴로워요. 세월호 기사나 책들도 제대로 읽어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김학의, 버닝썬, 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 저는 비현실적으로 펑펑 내리는 눈 속에 있었습니다. 여기는 그저 조용하고 아름다운 하얀 세상일 뿐인데 저기에는 피비린내와 주먹질과 칼부림과 정액 비린내와 마약과 강간과 살인으로 점철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그 눈 덮인 풍경에서 붕 떠서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김학의의 별장이나 버닝썬의 룸이나 고 장자연씨가 끌려갔던 술집에서 제가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처럼 계속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여성들이 당했던/당하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 속속들이 느껴지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강하게 이입되었습니다. 나도 한 끗 차이로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니까요. 가출 청소녀처럼 안전망 없는 여성들이 더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냥 아무 여성이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업가 여성은 거래 상대 사업가에게 강간당하고 강간 영상을 찍힙니다. 오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그 친구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강간 영상을 찍힙니다. 클럽에 놀러갔다가 나도 모르게 마약을 투여당하고 강간당하고 강간 영상을 찍힙니다. 그러다 계속 협박당해서 돈을 뜯기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하고요. 살해당하기도 하고요. 대체 여자들이 팔자가 좋고 편하게 산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리츨 사건의 이웃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요제프 프리츨 사건은 영화 룸의 모티브를 주었지만 영화보다 훨씬... 끔찍하죠. 어릴 때부터 알던 옆집 딸이 24년간 옆집 지하에서 근친 강간을 당하며 감금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죄책감에 휩싸였을 거예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껏 이렇게까지 권력에 의한 성폭력, 조직적인 성폭력을 모르고 살았나? 경찰, 검찰이 썩었다 썩었다 해도 이렇게 썩은 줄 몰랐나? 강간당하고 죽어가고 죽음마저 은폐되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알았나? 알았다면 뭘 했을 수 있었을까?

   

머리를 쥐어뜯어도 딱히 답은 없네요. 아니,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속속들이 모든 진상이 밝혀지길 빕니다. 그나마 촛불시위로 503이 물러가고 정권교체가 되어서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지만... 사실 전망이 아주 밝은 것만은 아니네요. 세월호의 진상규명도 아직 더딘 것을 보면 싹 걷어내야 할 암초들이 아직 너허어어무 많고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할 수 있는 행동을 다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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