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노스포)

2019.04.24 15:30

Sonny 조회 수:810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놀란 점은 사건과 인물을 맞이하는 카메라의 태도입니다. 일반적인 한국영화에서 자식이 아버지의 불륜을 알아차렸을 때, 이를 파국적 드라마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정말 쉬운 드라마적 소재입니다. 한국인들의 맵단짠 식성에 딱 들어맞는 분노슬픔웃음 삼종세트를 한번에 끓여낼 수 있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감독 김윤석은 그렇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인물들은 화를 내고 이리저리 분주하지만 카메라는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지긋이 응시합니다. 심지어 자기 세대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남이야기 하듯, 혹은 자기 이야기를 참회하는 듯 보고 있단 말이죠. 이 침착한 카메라를 진정 어른의 자세라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래요. 감정이란 게 정말 우러나오는 경우가 많던가요. 저같은 경우 멍텅구리 팝콘 영화를 보면서 되게 잘 웃습니다. 별로 재미없는데도 "열심히" 웃어요. 그래야 덜 괴롭고 그 영화와,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호흡을 맞추는 느낌이 나니까요. 그나마 이런 환경적 압박에서 자유로운 감정이 슬픔이지만 이것도 요즘은 외부나 영화에 저를 좀 맞춰들어가는 걸 느낍니다. 이렇듯이 사람의 감정은 자신도 못알아차리게끔 외부를 향해 과도하게 발산될 때가 많은데, 김윤석은 자기 영화에서 그러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화내고 쪽팔려하고 질질 짜고 웃어도 되는 상황에서도 흠... 하며 묵묵히 바라본다는 거죠.

어쩌면 김윤석은 카메라의 반응이 관객의 반응을 앞서는 오버액션으로 비춰지는 게 정말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어떤 사건을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는 오히려 말없이 그걸 곱씹을 뿐이거든요. 한마디라도 뱉었다가는 그게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부풀리는 것 같고, 자기 반응이 사건의 주인공들을 덮을까봐 염려가 되는 그런 사려 말이죠. 이야, 저 개저씨 봐라 불륜이다!! 라면서 같이 화내자고 판을 깔 수도 있었고 이야, 저 개저씨 봐라 불륜이다.... 하면서 끝없이 경멸할 수도 있었고, 이야 저 개저씨 봐라ㅋ 불륜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 하면서 크게 비웃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윤석은 그렇게 안합니다. 그냥 봐. 내 세대의 어른들이 어떤 인간인지를. 하고 조용히 응시합니다. 심지어 개차반인 윤아아빠를 보여주는데도 그렇게까지 막 욕하질 않습니다. 저런 어른도 있어... 하며 그의 무책임함을 힘을 빼고 담고 있는 느낌입니다.

누군가가 김윤석이 이 영화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한남이다를 복화술로 말하고 있다는 트윗을 봤는데 정말 공감합니다. 그는 정말 나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연민의 함정에도, 자학적인 고해성사의 늪에도 빠지질 않습니다. 그게 정말 놀라웠어요. 부끄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제가 참으로 본받아야 할 어른의 자세이자 어른의 영화라고 느낍니다.

그런 와중에도 여자아이들이 눈을 부라리고, 어른들 말을 짤라먹을 때마다 "부끄럽게 늙은 우리에게 반격하는 너희들!" 라며 그 에너지를 타인의 시선으로 담으려는 노력까지. 카메라를 흔들고 끝없이 줌을 땡기면서 감정을 렌즈로 퍼내려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렇게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영화를 보게 되서 참 반가워요. 적어도 제가 보고 싶은 건 슬로우모션으로 죽어나가는 시체들이 아니라 웃지도 울지도 않고 어른의 수치를 고스란히 견디며 못다한 책임을 후세대가 기꺼이 가로채갈 수 있도록 하는 이런 영화입니다. 다들 그러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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