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마지막 4중주

2014.06.20 15:42

잔인한오후 조회 수:880

로버트 A. 하인라인의 <프라이데이>에서 (정확하진 않은데) 두 명의 아빠와 두 명의 엄마가 함께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족이 잠시 나오죠. 제게 있어 마지막 4중주는 특수한 형태의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타칭 막장 드라마란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직유는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죠. 적어도 혈연의 비밀이 숨겨져있지도 않고, 각자의 파탄은 106분 사이에 전부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에게 전해지니까요.


음악을 하나도 모르는지라 살짝 두려움에 떨며 보기 시작했는데, 웬걸 EBS에서 4중주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다큐멘타리 대신 틀어줘도 되겠더군요. 영화 내에서 4중주에 대한 가상의 다큐멘타리도 아주 조금 나오죠. 혹시하며 아쉬웠던건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깔리는 배경 음악들에 어떠한 암시나 농담같은게 배치되어 있는데 나는 못 알아차리고 넘어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어요. 제1 바이올린과 2 바이올린이 다툰다던지, 비올라나 첼로의 독주(가 가능한가?)하고 있는데 못 알아챈다던지 하는 그런 거 말이에요. 뭐, 음악이란게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귀에 들리는건 아니니까 들려오는 대로 듣기나 하자 생각하고 넘겼지만요.


보면서 계속 떠올랐던 건, 과거 즐겼던 MMORPG와 TRPG였습니다. MMORPG는 정확히 말하면 WOW인데 여기서도 서로의 역할을 분담해서 2 ~ 3시간을 서로에 맞춰 일정한 반복을 해야되는 일이기 때문이었죠. TRPG의 경우에도 역할분담이지만 WOW에 비해서 만나면 시간을 굉장히 많이 잡아먹어요, 다만 반복은 아니죠. WOW에서는 여러 직업이 있는데 어떤 보상을 얻으려면 그 직업 각각이 모여서 한 단위에 대략 30분 정도 되는 군무를 일정한 결과를 위해 모두 정확한 반복을 해야 하죠. 그 군무는 한 꾸러미에 7개에서 8개가 있구요. 그것을 아주 잘하는 소수가 모여 서로에게 맞춰나가면서 반복하는 일은, 반복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즐겁죠. 그리고 잘하는 인원은 정말 한정되어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고, 다른 모임에서 빼내가려고 하면 다툼이 일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 역할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요.) 뭐, 이런 일은 가장 하드코어하게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일이니 공감이 되긴 힘들겠죠. 하긴 굳이 가상모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반 동아리 모임이나 독서모임 등의 경험에서도 마지막 4중주에서 다루는 소재의 일부를 공감할 수도 있죠. 그래도 무언가 모여서 반복하고 그 호흡을 정갈하게 맞추고 오랫동안 한다는 게 이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더라구요.


솔직히 이 영화에서 느낀 점은 많지만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감명받았을 피터의 강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까요? 세계에는 자신과 같은 창작물을 내놓는 수많은 창작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는 방법은 내 자신의 온갖 혐오의 결정체인 창작물 가운데서도 세계의 어떤 이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을거라는 만족감에 대해? 아니면 완벽주의자인 다니엘이 세상은 원래 엉망진창이야! 하고 소리지르는 처음이자 마지막 격노? 이유를 알 수 없이 닥쳐오는 정신적 폭력을 모두 감당하고 소화해내야 하는 줄리엣의 고통을? 이 모든 것은 시간의 과정일 뿐, 가족은 개인보다 앞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가족신화적 관점? (그래도 4중주단은 가족과 달리 끊임없이 결과물을 내놓기는 하죠.) 감정역학은 저보다 다른 분들이 더 잘 설명하실테니 이건 이대로 두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영화 보는 도중에 [속삭이는] 걸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4중주에서 두 사람이 대화할 때 자주 자신의 톤을 낮춰 속삭이거든요. 그리고 그 속삭임은 제가 눈치챌 만큼 다양한 높낮이를 가지고 연주되었죠. 아주 낮게, 조그마하게, 상대에게 들리지만 조심스럽게, 조금 높지만 진중하게, 등등 그런 어조를 영화 상에서 변주되는걸 본지 오래되었단 생각을 했습니다. 하기사, 제가 드라마나 멜로 영화를 왠만해서야 안 보니 목성을 높히거나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만 들을 수 밖에 없었겠죠. 다른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제일 맘에 들고 기억에 남는군요.


교양악단의 연주를 딱 한 번 들어봤는데 고전 음악에 대한 편견이 많이 벗겨졌었죠. 상당히 무지한데다 관심이 없으면 접하기도 어려운 것인지라 경험해보니 상당히 재미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익숙하지 않으니 잊고 지냈었는데, 주변에 혹시 현악 4중주가 있다면 보러가야겠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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