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루시

2014.09.13 14:41

잔인한오후 조회 수:1896

어쩌다보니 누군가 올해의 스칼렛 요한슨 삼부작으로 뽑은, [그녀] [언더 더 스킨] [루시]를 다 보게 되었습니다. ([언더 더 스킨]은 13년도 개봉인데다 [그녀]에 출연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예인이나 배우에 관심이 없는 저로써도 이 정도로 반복 학습을 하게 되면 사람 이름 정도는 외우게 되더군요. 영화를 그 자체만으로 인지하기만 해서 감독의 연속성이나, 배우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편인데다 그런 것을 언급하려면 상당히 그 맥락을 잘 꿰뚫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에, 아 그렇게까지 알아보려면 귀찮겠다 싶어 부러 관심을 끊어놔서 이 모양이긴 하지만요. 그만큼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미 이전부터 사람들을 사랑해온 사람들에게 약간의 열등감도 있어요. 그런건 벼락치기로 구성한다고 해서 따라갈 수 없는 연륜이 있는 거거든요. 어떤 배우에게 꽂혀서 장기적으로 팬질을 한 사람이라던가, 영화 감독에 꽂힌다거나, 영화사의 흐름 그 자체에 푹 빠졌을 수도 있죠. 분명 이렇게 저렇게 검색을 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의사-팬질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애정이 빠져서야 엉성할 나름이겠죠.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오랜 집착인데, 인공적으로 속도를 높여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요. 좋아하는 만큼 속도를 내서 차분히 차근차근 그만큼 키워나가는 거죠. 어쨌거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특정 연예인에 푹 빠져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연속성을 언급하는게 꺼려진다는 거에요. 근 1년 사이의 스칼렛 요한슨 출연작(?) 3편을 보고 그녀에 대해 인상비평을 하는게 이미 이전부터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어수룩해 보일거란 거죠. 그런데 최근들어, 좀 넘어지고 바보같으면 어때,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작품만 봐서는, 사람들이 요한슨을(아니 스칼렛을, 이라고 해야되나요?) 인간으로 보지 않는거구나 싶더군요. 뭐, 그 사이에 블랙위도우 역도 있고 그랬습니다만, 비인간 전문 배우도 아니고 인간의 지평을 벗어나는 역할을 맡게 시키니 이런 외모(와 목소리)는 그런 역할에 걸맞다고 판단이 되는건가 싶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뭘 가지고 있는 걸까요?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잔혹한 일을 해도 아무렇지 않거나 내심 숨기는게 있음을 짐작할만한 외모?


우연한 일치에 대해서는 이만 끝내고 루시를 볼까요. 결말이 이상하든 과정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든, 전 흠뻑 빠져들어서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오프에서 잠깐이나마 몇몇 지나가는 평을 들었는데 '액션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당장 보러 갔죠. 사실상 이런 작품을 액션으로 분류한 것 자체가 잘못 아닌가요? SF라는 좋은 분류가 있... 그러고 보니 그 분류가 실제 영화관 분류상에 존재하나요? 그러고보면 [그녀]의 경우도 드라마로 분류가 되었고, (저는 보기 전에 보지도 못했지만) [언더 더 스킨]의 경우, 스칼렛 요한슨의 노출씬이 있다고 광고해놨더군요. (정말 그걸 기대해서 본 분들은 쌤통이다..) [루시]를 다 보고 나서 갑자기 아, [트리 오브 라이프]를 꼭 봐야겠다는 정말 쌩뚱맞은 결심을 했습니다.


루시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걷어차여 인류 외의 존재로 튕겨져 나가게 됩니다. 멍청하지만 안온한 무리 바깥으로 홀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죠. 그래도 다행이에요, [엑스맨]에서는 고작 주어진건 무작위적인데다 힘도 제각각인 능력에 불과했지만 [루시]에서는 끝을 모르는 지능의 증가입니다. 이러한 지적 생명체는 과거에는 "전지전능"한 신에게서 (아쉽게도 전지하고 전능하지는 않는 신은 그렇게 많지 않죠) 찾아볼 수 있었고, 현재의 창작물에서는 의학의 도움을 받은 인간 군상에서 찾아볼 수 있죠. 그리고 천재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뭐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엄청 많잖아요, 그 특성을 가진 인물 자체로만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니까 말이죠.


그래도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전지함]이 납득 될만한 수준으로 서사를 전개해나가는 사람은 지금까지는 딱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테드 창의 [이해] 말이에요. 사실 작가가 천재가 아니니, 이상적인 천재를 상상해서 그리기는 무지 어렵겠긴 하지만, 같은 멍청이인 저나 다른 사람을 속이긴 해야할 거 아녀요. 똑똑해져서 하는 일들이 고작해야 부자가 되거나 세계 정복 따위를 노린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일종의 무한함으로 내달리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만큼 뛰면 헛점도 많이 생기고 감당해야 될 것들도 많으니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죠. 테드 창은 디테일에 엄청 강한 사람이니까 전부 적당히 채워넣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냈고. [루시]의 경우에도 어느 지점까지는 그러한 설득력이 탁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뇌를 100% 쓴다고 하면 굉장히 많이 먹어야 할텐데?란 생각 하자마자 음식들을 우적우적 씹어 넘기는 장면이 나오는건 참 좋았죠. (뭐, 뇌를 15% 쓰느니 40% 쓰느니 하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어요, 그냥 메타포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지 않겠습니까, 상당히 거슬리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저는 전지성(또는 그와 근사한)을 가진 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합니다. 그러고보니 [모모]에 나오는 카시오페아는 인간도 아니군요. 혹시 [루시] 수준의 묘사를 하는 다른 전지성을 가진 등장 인물이 나오는 창작물이 있다면 권해주세요. 무지 좋아합니다. 또 전지성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로 지식을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캐릭터도 상당히 좋아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기에 [그녀]도 굉장히 재미있게 봤고, [루시]도 거기서 벗어나진 않죠. 네, 제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이어서 호평을 할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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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 분이 전번에 그런 지식 흡수를 다뤘던 전례가 있더군요. (그러고보니 입에서 뭔가를 쏟아내는(?) 것도 전례가..) [제 5원소]에서 이 장면 상당히 좋아했었죠. WAR를 입력하는 부분은 유명하니까 패스. [루시]는 그다지 결말이 기대되는 작품은 아니었고, 과정 중에 그녀가 바라볼 수 있는 걸 함께 바라보며 롤러코스터 타는 재미로 봤죠. 그녀가 볼 수 있는걸 본 게 아니라 [본다]는 감각으로 압축되어 감독이 겨우 겨우 재해석해서 떠 먹여주고, 가지고 노는 것 정도만 볼 수 있었던 거겠지만 말이죠. 사실 슬근슬근 전지해져가다가 전지를 바탕으로 전능에 이르게 되는데 그 결말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뭐, 최민식 이야기와 한국 사람들 이야기도 잠깐 해야겠군요. 상당히 웃겼어요. 다른 무엇보다도 (조폭) 한국 남성으로써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일들을 열심히 해줘서 말이죠. 어떤 면에서는 부당할지도 모르고, 그런 범주화에 반대하는 편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외국 영화에서 조차 그런 식으로 한국 (조폭) 성인 남성의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말이에요. 이질적이라기보단 너무 익숙해서 재미있더군요. 한국의 조폭 3부작 같은건 진절머리치며 도망다녔는데 외국 물을 먹었다고 관용적으로 받아들이는건 이중잣대인가 싶긴 하지만 말이에요. 뭐 어쩌겠습니까, 맞다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창작물들로 쌓아왔던 이미지가 있으니 인과응보 같기도 하고.)


주인공이 남자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 생각해봤죠. 폭력의 도치나 (육체의 약함에 대비되는) 지적 우위를 더 강하게 드러내려면 현대의 시점에선 여성이 적합했겠고, 다른 무엇보다 지적인 여성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 그린 작품을 찾기란 어려우니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지혜를 포기하고 멍청함을 포옹하는 모습을 칭찬한다거나 하는 짜증나는 작품들이 잔뜩이죠. 저는 이성애자니까 더욱이 지적인데다 여성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었죠. 약간 투덜대자면 결말부에서 굳이 신체변형을 해야되었던 겁니까? 가끔 감독들이 이-인간이나 악의 평범한 외모를 참을 수 없어서 신체 변형을 시도하는 경우가 다수인데 [루시]도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더군요. 외부 조종 내지 원격 변경이 가능한데 굳이 미학적으로 그렇게 변했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겉보기에 멀쩡한 형태로 도약을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연산 심화를 위해 컴퓨터를 재조립시키는 정도야 손 안대고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는데 말이죠.


뱀발, 빠르게 정보를 흡입하는 장면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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