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맨 오브 스틸

2013.06.15 23:49

잔인한오후 조회 수:1389

0_ 제 머리 속엔 오리지널 슈퍼맨 스토리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제게 있어 슈퍼맨이란 2차 창작에서 그 파편들을 얻어 껴맞춘 누더기 인형이었죠.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이나, 최규석의 <콜라맨>, 망토를 두르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아동 사고와 엔하위키의 크립토나이트 페이지, 또는 배트맨과 슈퍼맨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 질문에서 박식한 대답 등이 알듯 모를듯 쌓여, 마치 슈퍼맨 영화와 만화를 본 세대처럼 지냈죠. 그러니까 영화관에서 망토를 두른 하늘을 나는 사내에 대한 영화를 본건 이게 처음이에요.


1_ 전 광대한 파괴를 좋아하고, 신화적인 충돌을 표현하는 데 있어 그 서사가 어떻게 되었든 리얼리티 자체만을 사랑하기에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 있었어요.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도, 후식까지 빼먹지 않고 내놓는 정식 코스의 포만감은 다른 부분에서 투덜거린다 하더라도 영화는 본분을 다했죠. 아직도 그 거대한 배경에서 조그마한 움직임을 잡아 낼 때 그 일부분이 광대함의 부분임을 알리기 위해 피사체 멀리서 화면을 살짝 흔든 다음에 쭉 당기는 영상 문법이 여운으로 남아 있어요. 예측지 못한 것을 잡아 낼 때의 아마추어 카메라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직도 멘하탄에서 테라포밍하는 기계가 박동하기 시작할 때가 떠올라 두근두근 거립니다. 서사 따윈 상관 없이 게임 오프닝을 보듯 그런 파괴행위가 줄줄이 이어져 나와도 넋 놓고 볼 자신 있는 CG빠가 배가 탱탱 불러서 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2_ 이런 영화에서 철학을 논해야 할 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제 느낌은 이 놀이 전체가 크립톤 아버지의 규칙 판에서 놀아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무언가를 강제하는 아버지보다 무서운 아버지는, 무언가에 대해 선택권을 주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선택을 자발적으로 아들에게 하는 아버지, 즉 반항마져도 자신의 규칙에 포함하는 포괄적인 아버지의 무서움이었어요. 기자가 외계인의 기지에서 탈출할 때 주도면밀하게 기자의 움직임을 정했던 것처럼, 칼엘의 선택을 자발적인 선택이지만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상황으로 만드는 그 포섭능력은 대단하다 생각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무거운 이야기를 빼버리고 가볍게 이야기하면 "역시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군, 이라 생각했죠. 33년 간의 정은 동족 살해마져 할 수 있도록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칼엘은 정말 운 좋게도 좋은 부모를 만났다 생각했고 나쁜 인간 부모를 만났으면 어땠을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슬럼가라던가, 바다에 떨어졌을 수도 있고, 광신도 가족이나 고아원에 보내졌을 수도 있겠죠. 다른 걸 다 떠나서 정부에서 찾아왔을 수도 있겠구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느긋하게 재미있었던 부분은, 스펙타클이 나오기 전에 허름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든 개인 증명이 허위인 선한 사마리아인인 외계인의 모습이었죠. 대충 훔쳐다 옷을 껴입고 여기저기를 방랑하는 모습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니트끼 100%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전 수염을 안 밀었을 때가 정감 넘치고 더 호감이 가더라구요. 왜, 수염 안 기르던 사람이 폐인되면 수염 기르는 시츄레이션을 보여주지만, 수염 기르고 다니던 사람이 말끔하게 수염을 밀어버리니 어색함과 아쉬움은 뭘로 채울 수 있으련지.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고 고행자처럼 나이 먹게 보이다가 수염 밀고 복색도 깔끔해져서 어리게 보이니까 참 적응 안 되더군요.


3_ 몇몇 궁금증과 답답함. 처음에 크립톤 행성이 터지는데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뉘죠. 그리고 온건파는 코덱스를 빼앗아서 아이한테 주입한 후 외계 행성으로 날려보내 버리고, 과격파는 코덱스를 얻으려다 제압당하고 영구추방령을 받게 되는데, 영구 추방령 후의 남은 사람들은 탈출을 했는가 안 했는가가 궁금해요. 저와 함께 본 지인은 희한한 복식의 의회에 라라와 행성이 터질 때 그 행성을 관조하는 라라가 같은 사람이라고 했고, 저의 경우에는 의회는 따로 탈출하고 그 행성 가까이에 남아 있던 과격파들이 행성이 터짐으로써 봉인이 풀렸다고 봤거든요. 크립톤 행성이 터질 때 과격파를 제외하고 모든 크립톤인이 죽은 건가요? 아니면 외우주로 떠난 건가요?


그리고 도대체 행성 내핵에 무슨 짓을 했길래 그렇게 터져버리는 걸까요? 행성 내핵을 가지고 핵분열이라도 하면서 연료봉을 꽂아넣어 속도를 조정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요? 행성 급의 에너지 공급원을 관리하던 지성류가 에너지를 빼먹던게 식어서 사라져버리면 모를까 폭주해서 터져버리게 만든다는 것이 참. 테라포밍 기술력을 보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거나 행성 터트리기는 우주 규모에서 한 번은 해먹어야 재미있는 일이라서 그러긴 하겠지만 적색거성처럼 불어터지다 못해 빵 터지는 것도 아니고, 쉬익- 펑 터진 다음에 식다니 중력마져 제어가능한 지성이 뭘 잘못 했는지 궁금하더군요. 허술한 코덱스 방비도 그렇고.


또 테라포밍 말인데 굳이 지구에다 할 필요 없이 자궁공장(제네시스) + 코덱스(칼엘에게서 추출한 피) + 테라포밍 기기(월드 뭐시기)를 가져다가 화성이나 금성 가서 쿵딱쿵딱 했으면 됐을 껄 왜 저항이 심한 곳에다 하려고 했는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완전 망했잖아요. 가이아 식으로 태양이 젊고 지구의 대기가 좋아서 강해졌다고 한다면 어차피 지구의 대기 크립톤식으로 바꿀꺼 상부상조하면서 금성에다가나 하지 애꿎은 동족 다 날려먹고 닭 목 비틀듯 허무하게 죽어야 한다니 무한한 시간 동안 갖힐 것을 각오한 사람치고는 너무 성급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시 군바리로만 이루어진 정부체계는 앞 뒤가 꽉 막혀서 안돼란 생각을 했어요. 흑흑, 과학자랑 정치인은 연애질 하는데 군인은 연애 고자라니. 게다가 보니까 남녀 성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상명하복의 군대 내에서도 서로의 애뜻한 전우애가 막 보이던데. 이게 무슨 진화적으로 우월한 민족이랍니까ㅠㅠ.


깨알같은 원주율표에 없는 물질. 농담이라도 원주율표는 우주에서 안정적인 물질들로 나열되어 있는데 굳이 원주율표 외의 화학식이 아니라도 외계의 것일 가능성이 높을 텐데 (차라리 원주율표 내의 것이여야 같은 우주의 물질이 아닌가 싶고) 괜한 설정 집어넣었단 생각을 했죠. 뭐, 역시 외계인 테크놀로지로는 못 할것이 없겠습니다만.


4_ 동족 수십 명을 차원 드라이브 폭격으로 날려버렸을 때는 피도 눈물도 없었지만, 일대일 맞대결을 해서 자기 손을 더럽히며 죽여야 할 때는 고통스러워하는 칼엘을 보며, 역시 폭격이란 비인간적이며 실행 당사자의 감정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새삼 곱씹었습니다. 그리고 조드, 그 제네시스 뭐시기란거 다른 행성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며. 칼엘 피만 있으면 언제든 종족 부활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거 아닌지. 역시 자기 부하에겐 따뜻한 차도남이었는지 뭔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다 끝난지 알았던 스펙타클 액션신의 끝에 내 눈요기하려고 마지막까지 분노로 살아남아 33년간 겨우 적응한 새내기보다 몇 십 시간만에 적응해서 우월함을 보여주며 소비되는게 슬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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