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처음 ‘판매전’이라는 행사에 참가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아직은 학생들의 가두 시위를 쉽게 볼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로였는데, 여름이고 에어컨도 없었기에 넓지 않은 회장의 한 층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옷 입고 사우나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여하튼 즐거웠습니다. 남자와 남자가 OO하는 동인지를 처음 접한 때도 그때였습니다. 처음의 충격과 낯설음은 잠깐이었고 금방 젖어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만화니까’, ‘동인 창작이니까’, ‘아마추어 행사니까’ 가능했던 표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건이 받쳐준 덕분에) 꾸준히 판매전, 배포전, 온리전과  각종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잘 아는 동인작가의 초대로 참가했던 coex 인근의 작은(12부스 정도?) 판매전이 나중에 돌아보니 ‘한국 최초의 온리전’이기도 했습니다. 책장을 채우는 동인지가 어영부영 3~4천 권에 이르고, 부스 참가, 동인지 제작, 제작 후원, 행사 기획과 주최까지 할 만한 것은 모두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바닥이 참 (여러가지로) 위태로운 공간이라는 점을 여러 번 절감했습니다. 외부의 충격에 취약할뿐더러, 가만 놔둬도 알아서 잘 깨져나갑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특성은 동인 시장뿐 아니라 만화, 애니, 게임 그리고 (성우와 라이트노벨 등 주변 장르를 모두 아우르는) 서브컬처 전반에 모두 적용됩니다. 구성원들이 일제히 츤데레이거나 프로불편러여서가 아닙니다. 서브컬처에서 무언가를 다루는 방식과 다루는 내용 모두가 기존의 법제도와 사회 관습에 대하여,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바로 넉다운 될 정도로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 책장의 동인지 서가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통칭 ‘2차 BL’은 예전부터 서브컬처의 가장 취약한 고리 중 하나였습니다.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2차 창작(저작권 침해)이면서 해당 인물(캐릭터)의 성적 정체성을 왜곡하여 소비하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며 더불어 윤리적(성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장르이기 때문에 그 존립근거 자체가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장르는 지난 20~30년간 서브컬처에서 상당한 (동인 시장에서는 아주 큰) 지분을 차지하며 존속해 왔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서브컬처 업계의 소비자와 작가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성향 소비자들은 여성작가/동인들이 남성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소비하든 묵인하며, 마찬가지로 여성향 소비자들은 남성향 창작물에서 여성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든 묵인한다는 암묵적 합의, 상호존중, 신사협정(숙녀협정?) 말입니다. 2차 창작을 묵인받은 처지에서 원작자와 판권사에 악영향이 갈 만한 언행은 최대한 삼간다는 스탠스도 그러한 합의의 일부고요. (물론 ‘실사’가 아니라 ‘2D’이기에 가능했던 합의이기도 할 것입니다.)

방송사 게시판 등에서 종종 보이는 ‘반대편 성에서 보기에 불편한 장면에 대한 집단적 항의’가 서브컬처에서 발생하기 시작하면 업계 자체가 끝장이라는 걸 모두가 알기에 법으로 정한 것이 아님에도 모두 따르던 합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이제까지 시장이 유지되어왔습니다. 또한, 이런 합의를 전제로 서브컬처 업계는 아청법 이슈, 저작권법 이슈, 표현의 자유에 관련한 이슈 등 전체 판에 영향을 줄 만한 문제에 대하여 장르와 소비자/생산자 여부를 불문하고 대외적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이 사건은 지난 20~30년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왔던 서브컬처 업계의 암묵적 합의를 단 며칠 만에 산산조각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슬아슬하다는 건, 기존 구성원들이 억지로 참아 주던 상황이었다든가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모두가 만족하고 있더라도 단 한 사람이 불만을 품고 뛰쳐나가서 여기저기 찔러대는 것 만으로 전체 판이 붕괴될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마블 캐릭터의 2차 BL 동인지 판매건을 디즈니에 고발한 내용이 대놓고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파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서브컬처 관련자로서 할 말이 없는 것이 이렇게 되어도 ‘법적, 도덕적 정당성은 어디까지나 저쪽에 있다’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허락받지 않은 2차 창작을 통해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소비하는 콘텐츠를 배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를 조롱하는 언행을 거듭하는 ‘일부’ 창작자들과 업계관계자들은 이제까지의 암묵적 합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었던 건지 이제라도 (차마 이미 늦었다… 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되새겨 주었으면 합니다. 

자신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레토릭에 정당성이 있다고 자부하기 이전에 서브컬처 분야 창작 활동의 법적 사회적 기반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취약하며, 그럼에도 독자들과 ‘다른 취향’의 사람들을 아우르는 상호존중 위에 위태롭게 성립되어왔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껴주었으면 합니다.





p.s. 게시판에 관련 의견이 있는지 부러 확인하지 않고 적은 글이어서 맥락이 이탈하는 부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점 이해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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