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영화 모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링 신경 안 쓰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적을 계획이니 읽기 전에 참고하세요.



1. 갑작스레 무간도를 본 이유는... 뭐 넷플릭스 구독자분들이라면 짐작하시겠죠. 며칠 전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됐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이것도 넷플릭스 바낭... ㅋㅋㅋ


다시 보니 참으로 소박한 영화더군요. 뭐 80~90년대 액션 스릴러물들이 지금 보면 거의 다 그렇긴 하지만 이 영화는 좀 더 심합니다. 액션이란 게 거의 없는 영화잖아요. 로케이션 장소도 경찰서 아니면 길거리, 다 쓰러져가는 낡은 건물과 유덕화의 새 집 정도. 제작비 얼마 안 들었겠더라구요.

런닝 타임도 한 시간 오십분이 안 되고. 이야기가 되게 경제적으로 팍팍팍 속도감 있게 진행됩니다. 딱히 뭐 주인공들 처지를 공들여 묘사하며 감정 이입을 유도하려는 시도 같은 것도 안 보이는데, 그래서 오히려 마지막에 둘이 만나는 장면에서 유덕화의 진심을 확신할 수가 없어서 스릴이 생기더군요. 뭐 결국 1분도 안 지나서 진심이야 어쨌거나~ 라는 식으로 결말이 나버리니 상관은 없게 되어 버렸지만.


초반의 마약 거래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하나의 장면이 가장 길게 흘러가는 부분인데, 길이가 길지만 그 안에 오만가지 이야기들을 다 때려 박아 놓아서 길다는 느낌도 안 들더라구요. 경찰측과 삼합회측의 멤버 구성과 각각의 성격과 관계, 두 주인공의 처지와 앞으로의 향방까지 이 한 장면에 필요한 이야기가 거의 다 들어 있는 게 참 각본 열심히 잘 썼다 싶었어요.


결말이 내용만 정리해보면 좀 허탈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뭐 결국 양조위의 최후는 홍콩 느와르의 인장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유덕화의 최후는 영화의 제목과 어우러지면서 나름의 향취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80~90년대의 오우삼식 홍콩 느와르였다면 두 주인공간의 감정 교류와 공감 같은 게 흘러 넘쳤을 텐데, 그딴 거 전혀 없이 상대적으로 건조하게 연출된 부분이 신선함을 주면서 홍콩 느와르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기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뭐 결국은 그냥 이 영화로 끝이었지만요.


근데 이걸 무려 16년만에 보니 이야기의 구멍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막판에 몰입이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진실을 깨달은 후 양조위가 취하는 행동은 그냥 말이 안 되죠. 깨닫는 그 순간 아주아주 평화롭게 모든 걸 해결하고 행복하게 정신과 의사 젊은이와 살 수 있었는데 굉장히 괴상하게 행동을 해서 전 양조위가 국장의 복수로 유덕화를 죽여 버리려는 건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작 막판에 유덕화를 잡고서는 체포를 하겠다며...;

예전에 볼 땐 이런 걸 거의 신경 쓰지 않고 봤거든요. 나이 먹으면서 성격이 까칠해지는 건지 그 시절에 비해 요즘 영화들 각본이 비교적 개연성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 건지 좀 궁금해졌습니다.


어쨌거나 재밌게 봤어요.

앞서 말한 그 소박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히트할만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사실 전 젊은 시절 유덕화에 대해서는 인상적인 기억이 전혀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참 괜찮았습니다. 




2. 디파티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영화의 길이였습니다. 오리지널인 무간도보다 거의 50분이 더 길어요. 처음에 원작에 없는 이야기들이 한참 나오길래 '기본 아이디어만 가져와서 그냥 새로 각본을 썼나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라 본게임 들어가기 전에 워밍업을 50분간 하더라는(...) 그리고 시작한지 한 시간쯤 지나니 무간도에서 5분만에 등장했던 장면이 그제서야 나오면서 이후로는 거의 충실하게 원작을 따라가더라구요. 허허허.


그런데 정말로 한 번 원작 따라가기 시작하니 뭐 세세하게 대사 하나하나까지 거의 그대로 재현을 하는데. 당연히 중간중간 디테일은 달라지지만 중요한 사건들은 거의 그대로 다 벌어지는 가운데... 원작에서 거슬렸던 스토리상의 구멍들이 하나도 해결이 안 돼 있습니다. ㅋㅋ 추가된 결말이 나오기 전까진 정말 그냥 충실한 재현이라는 느낌. 그래서 좀 삐딱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럴 거면 왜 리메이크를 한 거야? 50분동안 스콜세지 영감 좋아하는 밑바닥 인생 생태계 수다 떨고 싶어서? 흠...;


아 뭐 개연성 부분을 손을 댄 게 없진 않았어요. 지금 기억나는 게 무간도에서는 삼합회 보스가 죽은 후에 양조위가 유덕화 사무실에 가서 앉아 있는데, 경찰서 사람들은 양조위가 누군지, 왜 와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묘사가 되죠. 경찰서 나름 높은 사람 사무실에 그렇게 아무 일반인이 가서 앉아 있는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디파티드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잠복 요원이라는 걸 경찰들이 알고서 거기 앉혀 놨더라구요.

그런데 이로 인해서 바로 다음 전개에 더 큰 구멍이 생겨버렸죠. 자기가 잠복 요원이라고 말하고 와서 앉아 있었고 다들 그러려니 했으며 심지어 그를 기억하는 경찰학교 동기까지 있었는데 디카프리오씨는 면담 중에 그냥 자리를 떠 버리고,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하고, 우리의 디카프리오씨는 며칠 후 다시 만난 맛다몬군에게 '내 신분을 돌려줘!'라고 요구한단 말입니다? 대체 왜... 그럴 거면 그냥 앉아 있지 왜 갔어. orz


이렇게 투덜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주연&조연 배우들 다 연기 괜찮았고 (솔직히 맛다몬씨는 좀 미스캐스팅 같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연기는 괜찮았어요) 연출도 괜찮았고 결정적으로 추가된 결말이 참으로 미쿡 버전다워서 좋았습니다. 어차피 물 건너가 다른 문화권에서 리메이크된 것이면 원작과는 다른 해석이나 전개가 적절하게 들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결말을 그렇게 내 버리고 베란다 창가의 생쥐를 보여주니 뭔가 시원하게 찬물 끼얹는 느낌이라 좋더라구요.

아쉬운 부분은 오히려 원작을 너무 그대로 따라가면서 좀 허술한 부분까지 그대로 따라했다는 거. 그리고 기껏 시작 부분에서 한 시간을 투자해서 배경을 깔아 놓고 그게 그 후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거... (원작의 의사와 유덕화 아내를 베라 파미가 한 명으로 합체 시켜 버리길래 무슨 특별한 전개가 있을 줄 알았는데...) 뭐 그랬습니다.


다 보고 나니 쌩뚱맞게 마이클 만의 '히트'가 생각났어요.

제가 본 중엔 전형적인 홍콩 느와르의 공식을 그대로 갖다 쓴 첫 헐리웃 영화였는데, 설정은 그렇게 가져가 놓고 홍콩 느와르의 감상주의를 싹 다 쳐내버리고 건조하고 팍팍한 미쿡 프로페셔널들의 싸움 이야기로 만들어 놓았었죠. 당시엔 그러한 이유로 보면서 실망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접근법이 옳았던 것 같아요. 디파티드도 그 정도로 빡세게 번안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지금의 이 영화는 '괜찮긴 한데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라는 느낌입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디파티드가 원작보다 분명하게 나았던 점을 굳이 한 번 찾아본다면 음...

베라 파미가가 예뻤어요.

보다 중간에 접은 '베이츠 모텔'을 다시 봐야하나 싶을 정도.


네. 그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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