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제 경험한 일입니다.


어떤 남자분이 제가 일하는 가게로 들어오셨습니다. 

처음부터 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고, 우선 목동의 어떤 유명한 병원을 물어보면서 거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더라고요. 

아이팟 터치의 지도 켜서 지리 알려드리면서, 걸어갈 수는 있는 거리이지만 (제가 영화 보러 목동으로 한시간 정도는 걸어가는데, 딱 그 근처) 

걸어가기는 너무 먼 감이 있어서 차를 가지고 오셨냐고 하니까 아니래요.


걸어가시기 힘들거라고 하니까, 사실 목적지가 그곳이 아니라

그 곳에서 조금 더 걸어야야 하는 영등포 역이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사는 곳은 김포공항과 부천 옆 동네, 서울 변두리입니다.) 경찰이 알려주었다면서.

그제서야 설명을 머뭇거리면서 하시더라고요.


대전에서 서울로 오신 분이고, 제가 일하는 가게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은 구청의 설비 관련한 일로, 당장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이 근처에 집 구하러 올라왔다가, 택시에서 지갑, 가방, 핸드폰 모두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난처한 상황이라 파출소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도 경찰은 이런 경우 딱히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말했는데, 컴퓨터 조회를 해 보더니, 얼마전에 벌칙금 물은 교통위반 사실만 다시한번 확인했다고. 

(자기는 경찰이 도움을 줄 줄 알고 공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 어디서 중앙선 침범하셨네요? 빨리 벌금 내셔야겠어요" 라고 말해서 황당했다는...;;)


그래서, 일단 이곳에서 영등포 역 까지 걸어간 다음 (....굉장한 거리입니다...;;;)

영등포 역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대전까지 내려갈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에서 알아봐 준 것은, 이곳에서 영등포 역 까지 걸어갈 수 있는 중간 지리인 처음 저에게 물어봤던 목동의 모 병원.

그리고 영등포 역에서 대전까지 내려갈 수 있는 하루 세번 있다는 가장 싼 8천8백원짜리 기차표...정보였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여동생은 지금 호주에 있다고 하고요. 

그분 말로는, 일단 영등포 역까지 몇시간 정도 걸어간 다음, 정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대전까지 한번 몇 날 며칠 걸려서라도 걸어가보죠...^^;;" 이렇게 농담삼아 말씀하더라고요. 


순간, 고민했습니다.

이런 경우, 돈을 돌려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뭐랄까. 이분의 이야기에선, 말씀을 잘 하셔서인지 몰라도, 

교통비 핑계롤 돈을 사기치는 분들의 흔한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곤란한 상황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처음엔 영등포 역까지의 지하철 값인 2천원만 드리려고 하다가

(두시간은 걸어가야 할거에요. 영등포 역까지... 게다가 서울 지리 전혀 모르시는 대전 분이라니까.)

영등포 역에서 누군가에게 또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정 뭐하면 대전까지 걸어갈 각오를 하고 있다는 말에...


결국 영등포 역에서 누군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누군가가 내가 되는게 어떨까...

내가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경우,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이 순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 못 받을 결심을 하고, 돈을 빌려드렸습니다.

영등포 역까지의 지하철비 약 2천원과

기차표 만원을 지갑에서 꺼내 드리면서

예전에도 이런 경우 돈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이번엔 정말 사정이 곤란해 보이니...

손님을 (...이 분은 엄밀히 말하면 손님이 아니지만^^;;) 믿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 연락처는, 저에게 적어주시면서

비록 이번에 핸드폰을 잃어버렸지만, 회사에서 주는 번호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번호를 써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메모지에 제 연락처와 제 계좌번호를 적어가셨습니다.

(제가 쓰는 은행은 지금은 복잡한 외국계 이름으로 바뀐 은행이라, 종이 보고 우리나라에 이런 은행도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리고 앞으로 일 때문에 이 근처에서 사는것은 맞기 때문에, 나중에 꼭 감사인사차 가게에 한번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셨고요.






자, 결론.




저는 이번에도 또 바보짓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 손님의 난처해 보이던 순한 눈이 아직도 기억나요. 

처음부터 저에게 교통비를 요청했던 것이 아니고

제가 지갑을 꺼내자 처음엔 진심으로 괜찮다고, 그 목적으로 가게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고 거절하셨거든요.

서른여섯 먹어서 칠칠치 못하게 이런 일이나 겪는다고 자조하시면서 웃으시던 그 모습이,


많이 기억납니다.




그분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도, 제 계좌로 돈이 입금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제 선의를 나쁘게 이용하지 않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겐 꽤 큰 돈이거든요. 만이천원...^^;;

(영화관에서 내려가기 전에 안나 카레니나 영화 꼭 보고 싶었는데, 이번 지출로 포기할 정도 ㅠㅠ)







자, 어제 일은 잊어버리자. 레드 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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