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별회


오늘은 저희 반 녀석들의 학급 소집일이었습니다.

왜 있잖습니까. 방학 중에 괜히 불러내서 학교 청소 시키는 짜증나는 행사.


여덟시 반쯤 학교에 도착했는데, 아홉시까지만 오면 되는 아이들이 이미 와서 교실에서 북적거리며 뭘 하고 있더군요.

뭔가 싶어 교실을 들여다보니 풍선 불어서 바닥에 깔아 길 만들고 칠판엔 온통 꽃단장에 빈틈 없이 빽빽하게 뭘 적고 롤링 페이퍼에 케이크에 난리가 났습니다.

뭐하냐? 고 물었더니 저희 반 A양의 송별회를 준비하는 거라고.


방학 중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된 녀석이 있었거든요.

원랜 담임인 제가 방학식날 뭐라도 해 줬어야 했는데 그 날 이 녀석이 대사관에 인터뷰를 가는 바람에, 하루 일찍 해줘야하는 걸 까먹어-_-버렸었습니다.

그래서 기특하고 갸륵하고 해서 풍선 부는 거나 좀 도와주고 '송별회 마치고 내려와라' 라고 한 마디 남기고 교무실로 왔습니다.


아홉시가 조금 넘으니 교실 쪽에서 함성 소리,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떼창 소리에 잘 다녀와라 A야 등등 야단 법석이 시작되더군요.

그러고 20분쯤 후에 룰루랄라 아이들이 내려오고, 문제의 A양은 눈이 뻘겋게 되어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출석 부르고, 청소 지정해주고, 여전히 울고 있는 A에게 다가가 뭘 그리 감동 받고 그러냐 시크한 놈이 ㅋㅋ 이러면서 말을 거는데 녀석이 이민을 안 간다네요.


음. -_-;;;


막판에 어머니 비자가 안 나오게 되어서 이민도 유학도 다 취소되었다고.

그렇게 그 녀석은 서러움과 쪽팔림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습니다.


허허.


이 녀석.

방학식 전날에 북한 어린이 돕는다고 교과서 참고서 몽땅 기증하고 교복이랑 체육복은 다 친구들 나눠주고 상태 안 좋은 건 쓰레기통에 찢어서 버린 걸로 알고 있는데...


허허(...)



2. 이웃 사람


아파트에 삽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완전 아주 많이 오래 된 아파트는 아니랍시고 복도식이 아니라 두 집씩 마주보는 구조로 되어 있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윗층, 아랫층, 옆집에 누가 사느냐가 엄청 중요합니다.

윗층은 가끔 아가가 밤 늦게 뛰어다니긴 해도 대체로 무난합니다.

다이어트 한다고 하루에 두 시간씩 댄스 센트럴을 해도 아무 소리가 없는 걸 보면 아랫집은 참 좋으신 분들이구요.

가장 중요한 앞집도 좋았습니다. 처음 사시던 분들은 그랬어요(...)


처음 제가 이 곳으로 이사 왔을 때 앞집에 살던 가족은 뭐랄까. 아주 무난한 상상 속의 이웃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이 친한 척을 하진 않아도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인사하고. 가끔 음식도 갖다 주고 뭐 그런 것 말이죠.

특히 그 아주머닌 제게 음식을 갖다 주는 걸 좋아하셨어요.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아이스크림, 김밥, 피자빵, 잡채, 스파게티 같은 것을 주시곤 했었죠.

그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건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집에서 직접 만들고 그런 건 아니죠. 죠스바, 스크류바, 바밤바, 요맘때 뭐 이런 동네 슈퍼 아이스크림들 말입니다. 그 외엔...

잡채는 당면이 고무줄 놀이용 같았고. 스파게티는 케찹 볶음면. 피자빵은 케찹 구운 빵이었어요. 심지어 '이건 괜찮겠지!' 싶었던 김밥도 완전히 멸망 수준의 맛.

덕택에 받은 건 잘 먹지도 못 했고, 그래도 답례로 뭐라도 갖다 드려야 해서 심혈을 기울여 요리한 저희 집 음식들을 가져다 드려야 하는 부담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분이었어요.

(게다가 제가 심혈을 기울인 요리의 맛도 아마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복수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요.)


근데 결국 이 무난한 상상 속의 이웃은 올 1월에, 공동 현관 저희 집 앞에 다 낡은 이불 한 채를 무심히 남겨 놓고 떠나갔습니다.

그러고 새로 들어온 가족이 저를 곤경에 빠뜨렸지요.


일단 참 시크합니다. 대한민국 이사 가정의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는 '앞 집 방문' 같은 건 하지도 않구요. (물론 저도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쎔쎔;)

현관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인사를 안 해요. 아줌마도 아저씨도 5~6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도 안 합니다;

한 달쯤 전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버튼을 눌렀는데,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에 그 집 아줌마가 멍하니 서 계셨던 적이 있어요.

왜 살다 보면 몇 번은 겪지 않습니까. 층수 누른 줄 알고 룰루랄라 거울 보고 모니터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고 낯선 사람이 들어와 깜짝 놀라고 보니 1층이더라... 라는;

암튼 엄청 깜짝 놀라시는데 누군진 모르겠고 (항상 제 시선을 피하셔서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 암튼 민망하시겠다 싶어서 '몇 층 가세요?'라고 물었더니 홱 하고 제게 등을 돌리고 서 버리는 겁니다.

이상한 아줌마네... 하고 저희집 층에서 내리려는데 아주머니가 먼저 내려서 우다다 본인 집 비밀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시길래 그 때서야 알았죠. 반년을 살았는데. -_-;


얘기가 엄청 새고 있는데;


암튼 열흘 쯤 전의 일입니다.

칼퇴근하고 부리나케 집에 들어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잉여롭게 컴퓨터를 켜고 있는데 벨이 울렸어요.

화면을 들여다보니 바로 그 앞 집 아줌마!!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인터폰을 들고 '무슨 일이세요?'라고 여쭈어 보니... 


"아저씨가 담배 피우셨죠!!!!!!!!!!!!!!!"


"네?;;"


"복도에 냄새가 엄청 나잖아요!!!!! 아저씨가 담배 피우신 거죠!!!!!!!"


"아... 아닌데요?;"


"아니라구요!!!!!?"


뚝. 그리고


"쿠아앙!!!" 하고 문 닫는 소리.


아니 이건 또 도대체 뭔가... 싶었습니다.

아랫층에 복도에서 담배 자주 피우시는 아저씨가 있거든요. 바로 아랜지 더 아랜진 모르겠지만 가끔 통로에서 냄새가 나곤 합니다.

아마도 방금 또 냄새가 났고, 계절도 여름이고 하니 아줌마가 짜증이 났던 것 같긴 한데... 왜 죄 없는 나에게 다짜고짜 고함인지.

처음엔 그냥 웃어 넘겼지만 제가 또 내츄럴 본 작은 마음인지라. 날이 날이 갈 수록 생각이 나는 겁니다. 


아니 그 아줌만 도대체 뭐람.

인사도 안 하고.

내가 인사를 해도 안 받고.

공동 공간 우리 집 쪽에다 허락도 안 받고 자기네 자전거 세 대를 세워 놓고 살면서 말야.

의심이 간다곤 해도 증거도 없는데, 아니 증거가 있는 상황이라 해도 일단은 공손하게 얘기하는 게 상식 아냐?


갑자기 옛날 아줌마의 고무줄 잡채도 생각나고 세 개 먹고 버린 김밥도 그리워지고 암튼 막 그러다가 결국,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어제였어요.

현관 앞의 유모차를 통해 아줌마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목욕 재개를 하고 옷을 잘 차려 입고 앞집 벨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줌마에게 아주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말씀드렸죠.


"죄송하지만 저희 집에서 밖에 내놓을 게 좀 있어서요, 저 자전거들 좀 치워주실래요?"


그랬더니 대답이.


"아~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라.

이게 아니잖아.

왜 이리 싹싹해!! ;ㅁ;

왜 갑자기 이렇게 예의바르고 친절해진거야!! 화를 내라고! 치우기 싫다고 말 해!!! 내가 미리 준비한 싸가지 없고 야비하고 치사한 대사들을 쓸 기회를 달라고!!!!


하지만 그 분께선 싹싹하셨습니다.

10분도 안 되어서 그 곳에 있던 자전거는 치워졌고.

전 제가 한 말에 책임-_-을 지기 위해 그 곳에 종이, 플라스틱 분리수거 통을 꺼내 놓아야했죠. 집 안에 두는 게 분리하기 편하고 좋은데. ㅠㅜ

그리고 전 작은 마음 때문에 좁은 평수에서 애 둘 키우느라 답답해 꺼내 놓은 자전거를 치우라고 구박한 매정한 이웃이 되어 버린 기분에 하루 종일 시달렸구요.

덤으로 오늘 퇴근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옆 집 딸래미는 6개월만에 처음으로 절 보고 미소를 지으며 예의바르게 90도로 인사를 하더군요.


하하하.

아줌마가 3배 미워졌습니다.



3. 옛날에 어떤 글에서

아마추어 작가 지망생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이 '자기 경험을 남들이 재밌어할 거라고 착각한다' 라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꽤 공감했던 내용이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일 텐데 말이죠.


솔직히 말해서,

적기 전엔 재밌을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_ _);

하지만 그간 자판을 두드린 에너지가 아까워 배째라고 '등록' 버튼을 누르겠습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재미난 영상이라도 링크해드리려 했으나, 그 마저도 아는 게 없어서 그냥 고대 자료나 투척하고 사라질께요.



편안한 밤들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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