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다 애정이 있으니까 까는 겁니다. <-

라는 말을 일단 해 두고 싶구요. 재밌게 끝까지 잘 보고 여운을 즐기고 계신 분들에겐 난감한 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말씀 드립니다.



1.

좀 뜬금 없는 얘기로 시작하자면,

다카하시 루미코의 '시끌별 녀석들'이나 '메종일각', '란마1/2'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가장 감탄스러웠던 건 끝도 없이 솟구쳐 나오는 아이디어 보다도, 그 막나가는 개그의 향연과 장기 연재 속에서도 주요 인물들간의 로맨스를 잘 잡아내며 끌고 가는 작가의 역량이었습니다. 이게 그냥 로맨스만 떼어 놓고 보면 참으로 뻔하고도 도식적이며 심지어 의무 방어전 같은 성격이 강하거든요. 근데도 작품을 보다 보면 어느샌가 설득되더란 말이죠.

포인트는 작품 속 [개그&액션 분량과 로맨스 분량], [주연들 이야기와 조연들 이야기]의 적절한 배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논스톱 개그 & 액션 퍼레이드 속에 슬쩍슬쩍 감정선을 끼워 넣는 루미코 여사의 빼어난 감각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작정하고 주인공 로맨스'로 가지 않고 양념 정도의 분량으로, 하지만 충분히 임팩트있게 주인공들의 연애질을 끼워 넣었기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봐요.


'응답하라 1997'의 로맨스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90년대 대중 문화(특히 1세대 아이돌 팬질)로 추억 팔이 + 간만에 보는 리얼한 '듯한' 청소년 드라마가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풋풋하게 끼어드는 주인공들의 짝사랑 이야기들은 그 뻔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호소력이 있었어요. 기본적으로 깔리는 드라마, 사건들이 등장 인물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니까, 진부하면서 때론 황당한 느낌의 연애담일지라도 쉽게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문제의 '6년 점프' 이후론 그게 다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동안 공들여 매력적으로 키워 놓았던 등장 인물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버린 채 끝까지 한 자리로 온전히 모이질 못 했고. 그 와중에 윤제-시원-태웅의 삼각관계 하나에 분량이 집중되면서 이들의 연애담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이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렸죠. 그러니 이들이 울고, 소리치고, 싸우고, 화해하고, 키스하고,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등등 무슨 짓을 해도 시큰둥한 느낌만 들면서 '얼른 결혼이나 시켜라잉.' 이란 생각 밖에;


다시 한 번 루미코 여사 얘길 하자면 그래요. 많은 등장 인물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해도 어차피 작품의 말미로 가면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압축되는 건 당연합니다만. 이 분은 그런 순간에도 그간 착실하게 키워온 조연 캐릭터들을 그렇게 허투로 대하지 않습니다. '메종일각'의 일각관 주민들이든 '이누야사'의 법사와 산고, 셋쇼마루 패거리 같은 캐릭터들이든 작은 분량 속에서도 끝까지 본래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죠. 독자들이 작품을 봐 오면서 사랑했던 것이 이런 주변 캐릭터들 모두까지를 포함한 작품 속 세계라는 걸 아는 겁니다.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구요.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은 그러지를 못 했고. 그게 정말 아주 많이 아쉽습니다.


아니 정말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시원이 부모님 좀 봐요. 그 분들이 그렇게 억지스런 상황에 구겨들어가서 재미도 감동도 없는 대사나 어색하게 쳐대다가 퇴장하셔야할 분들이냔 말입니까!!!!? 전 그 분들이 이 드라마에서 제일 좋았다구요!!!!!



2.

여전히 뜬금 없지만(뭐 제가 하는 얘기가 다 그렇습니다;) 이 시리즈가 제 취향에서 멀어져가는 걸 느끼며 '하이킥' 시리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시작할 때 미스테리 하나를 툭 던져주고. 샤방한 비주얼의, 하지만 설정상으론 좀 찌질한 젊은이들이 떼로 나와 아웅다웅거리면서 성장하다가 결국엔 러브라인 집착으로 끝을 맺는;


그래도 엄청나게 긴 여유 시간이 있었던 '하이킥' 쪽은 알량하게라도 인물들의 성장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었던 데 반해 한국 미니 시리즈 평균보다도 짧은 분량의 '응답하라 1997'은 그만큼도 할 수가 없었죠. 전반부만 보면 이건 분명히 성장담이었단 말입니다? 근데 그냥 '6년후'라고 하더니 형은 한국 최고 기업가, 동생은 판사가 되어 있고. 준희는 그냥 의사. 학찬도 유정도 모두 다 '그냥' 뭔가가 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도 없고 그렇게 된(?) 후에 무언가도 없어요.


아마 주인공들의 성장도 연애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긴 해요. 학찬이 갑자기 정신 차리고 유정에게 돌아와 잘 해주는 게 그렇죠. 하지만 역시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에 쌩뚱맞기만 합니다. 아니 다 떠나서 시원이 좀 봐요. 걘 6년간 안 보고 살다가 왜 갑자기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이랍니까? 이거 이해 되시는 분? <-



3.

이 쯤에서 한 가지 인정하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데...

사실 이 글은 그저 '이런 건 내가 원했던 응칠이가 아니라능!!!'이라는 제 개인적인 불평불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맘에 들었던 초반 전개에 혹해서 이후로도 쭉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길 바랐던 거죠. 드라마가 끝난 후, 오늘 사람들의 소감들을 보면 거의가 호평이니 그냥 제 취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orz


제가 원했던 건 이래요.

그냥 1997년에서 점프 없이 쭉 흘러가서 그 시절에 삼각 관계든 뭐든 끝을 봤음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단절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조연 캐릭터들도 그냥 그 시절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며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었겠죠. 그렇게 1997-200x년과 2012년 동창회. 이렇게 두 개의 시간을 무대로 했음 깔끔하지 않았을까 싶구요. 그랬다면 결국 결말은 지금과 같을지라도 훨씬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굳이 '6년 후'를 넣고 싶었다면 대략 플래쉬백 몇 번으로 간단히 처리하더라도 캐릭터들 성격에 변화를 좀 주고, 그렇게 그들이 만만치 않은 6년을 겪어왔음을 보여주는 식으로 갔으면 괜찮았을 것 같구요. 그랬다면 자연스럽게 인물들 어른(?)도 만들고, 애틋함도 오히려 더할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실제론 다들 냉동실에 6년을 넣어 뒀다가 방금 꺼내 해동시킨 듯한 모습들이어서 영;



4.

그런데 마지막회는 전 괜찮게 봤어요.

위에서 말한 막판 시원 부모 난입 장면과 시원이가 태웅과 아이스크림 먹으며 '오빤 설렘이 없다~'라며 테러를 날리는 파렴치한 장면(...)만 파내 버린다면 더 좋았었겠지만;

어차피 해피 엔딩으로 갈 거라면 이런 전개와 결말 이상은 생각해내기 힘들었을 것 같고. 시원과 윤제의 긴 연애질 분량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태웅의 황당한 인연 찾기는 그간 고생해준(?) 캐릭터에 대한 작가들의 배려 차원에서 이해해줄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막판 나레이션 러쉬도 그냥저냥 뭐. '왜 저렇게 목소리가 비장할꼬...' 라는 생각이 들긴 했어도 드라마의 분위기완 잘 맞게 적당히 오골거리고 적당히 괜찮았어요. 심지어 아예 끝 부분에 지난 장면들이 스틸로 지나갈 땐 좀 찡하기까지(...)



5.

그리고... 어지간하면 디테일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태웅 캐릭터는 정말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_-;;;

학력고사 전국 1위에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를 혼자 다 만들고 대통령 출마. 근데 성격은 소탈해! 동생을 아들처럼 아끼며 뭐든 희생하고 보살펴!! 심지어 연애질엔 순정파야!!!

...근데 왜 죽은 전 여자 친구 동생 겸 제자에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마구 꽂혀서 귀한 인생 6년이나 허비하고 난리였는지. (쿨럭;)

마지막회에선 방금 전에 자길 차고 동생과 사귀고 있는 여자랑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오빤 설렘이 없다!'는 말을 듣고도 허허 웃는 세인트한 모습으로 용의 눈깔을 찍어 주시더군요;


그래서 전 후반 분량을 보는 동안 6년 동안 진상 파워만 잔뜩 충전해 놓은 시원 캐릭터보다도 이 아저씨가 훨씬 더 거슬렸습니다. 

'시청자들에게 다들 성공하고 잘 사는 해피 엔딩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PD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은 잘 알겠고 공감도 하지만 이 분은 너무 과했다구요;



6.

마지막으로...

글 서두에도 적었지만 이게 다 애정이 있어서 까는 겁니다. 믿어주세요. 정말 오랜만에 볼만한 드라마 생겼다고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orz

예능 프로만 만들던 PD의 첫 드라마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출도 안정적이었고 화면들도 소박하면서도 예쁘게 잘 잡았어요.

각본도 제가 저렇게 난도질(...)을 해 놓긴 했지만 마지막 회까지도 소소한 개그들은 재치 있고 인상적인 게 많아서 풉풉 거리며 잘 웃었구요.

모처럼 그럭저럭 받아들일만한 학생 캐릭터들을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뭣보다 출생의 비밀도 없고 오로지 주인공에게 역경을 던져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악당도 없으며 음모와 배신도 없는 드라마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시즌 2 얘기도 나오던데. 그건 별로 원치 않지만서도(쿨럭;) 이 PD분과 작가들의 차기작은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봤어요.



+ 덤입니다.

쓸 데 없는 얘기지만 이제 이 드라마로 글 쓸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괜히 외쳐봅니다.


전 윤제와 시원이가 연결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

과거 회상 분량에선 잘 되더라도, 현재 장면에선 각자 다른 사람 만나 잘 지내는 쪽이 더 '본격 추억 팔이 드라마'에 어울리게 애상적이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하지만 '본격 국민 위로 환타지'의 장엄한 위용을 보여줬던 어제 마지막회를 생각하면 이건 참 큰일 날 바람이었더군요; 지금의 드라마엔 지금의 결말이 잘 어울립니다.

적고 보니 참 당연한 얘기지만; 암튼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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