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어디 쯤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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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가 처음 생체전기란 단어를 접한 건 '매트릭스'란 영화였다. 영화 속 기계가 정복한 세상에서 인간들은 전지마냥 캡슐에 갇혀 기계들에게 생체전기를 제공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냐는 중학생 견우의 질문에 과학 담당 교사가 차근차근 그 비현실성과 비효율성에 대해 설명해주기까지 그는 종종 기계들에게 잡혀 인간전지가 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 후로도 생체전기에 대한 그의 관심은 꾸준히 이어져 전자과로 진학을 했고 대학원 논문 역시 생체전기에 관한 것이었다. 다들 아다시피 생체전기의 흐름은 우리 몸 주변에 자장을 형성하고 일정한 파동을 내뿜는다. 이른바 생체파동이다. 종종 바이오리듬과 혼동되는 용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생체파동은 전기에너지다. 우리 몸이 하루 종일 일정하게 내뿜는 정확히 말하자면 질질 흘리는 방전에너지의 그래프인 것이다. 견우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 파동을 기존보다 더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고 파동의 형태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생체파동의 '공명'에 대해 연구했다. 생체파동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완만한 물결파형인 것이 일반적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 이 파동 간에 간섭이 일어나고 상쇄 증폭을 거쳐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이루며 공명하기도 한다. 파동의 궁합이 잘 맞으면 아름다운 공명을 이루며 상호간에 호감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서로 상쇄되거나 반대로 불규칙하고 불쾌한 파동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 경우엔 서로 간의 관계가 서먹해지거나 쉽게 다툼으로 이어지곤 한다. 실험관찰을 거듭하는 사이 견우는 이러한 생체파동이 특히 연인관계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장이나 진폭이 유사하거나 조화로운 경우에 남녀는 서로 좋은 첫인상을 가지게 되고 연인으로 쉽게 발전했다. 이후의 관계에서도 행복과 파동은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가지는 듯 보였다. 행복한 연인, 부부일 수록 파동간의 공명이 조화로웠다. 데이터들이 모일 수록 견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파동만으로도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상대방, 그러니까 운명의 반쪽이니 소울메이트니 하는 말로 대변되는 그녀를 찾을 수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느 새 박사과정을 마치고 정부 산하 연구소에 취직한 서른 살 견우는 그 나이까지 모태솔로였다. 그는 생체파동으로 자신의 인연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만나는 여자마다 일일이 생체파동을 측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생체파동을 똑같이 재현해서 증폭시켜 방출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LLW(Love-Love Wave)라는 이름도 붙였다. 그는 주말마다 사과상자 크기의 장비를 차에 싣고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파동을 뿌리고 다녔다. 자신과 공명할 수 있는 여성이라면 파동에 반응해 관심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달이 지나도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다. 파동이 충분히 증폭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더 크고 강한 파동생성기 LLW-2를 만들었다.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차에 이유없이 쓰레기와 돌을 던졌던 것이다. 파동이 맞지 않아 부정적 공명을 일으킨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도 효과를 확인한 견우는 연구소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짝을 찾아 나섰다. 6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몇 차례 폭도들과 마주한 외엔 이렇다할 수확은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파동생성기는 점점 더 개량되었고 LLW-8.2가 완성될 무렵엔 파동무기라고 불러도 될 수준이 되었다. 견우는 슬슬 불안해졌다. 계산상으론 장비가 생성해낸 파동 에너지는 거의 남한 절반을 커버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성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결론이었다. 그의 파동이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형태이거나 그를 사랑해줄 파동을 가진 여성이 한반도에는 없거나. 다시 3년이 지났고 견우의 LLW는 더더욱 강력해졌다. 더불어 견우는 위성을 해킹했고 코카콜라 선전에 자신의 생체파동과 개인연락처가 담긴 서브리미널 메시지를 삽입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성은 없었다. 모아둔 돈도 모두 써버리고 위성해킹이 들통나 수배까지 받게 된 견우는 절망했다. 무엇보다 이 지구상에 자신을 사랑해줄 단 한 명의 여인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자수를 결심한 견우는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시도해본 중 가장 강력한 생체파동을 발사할 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암시장에서 구한 구형 V-72 로켓에 실어 대기권 밖으로 쏘아올렸다. 역시나 불법이었다. 2년 뒤 감옥 운동장에서 아침 산책을 하던 견우는 자신을 감싸는 묘한 기운을 느끼며 문득 멈추어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비행체가 지구로 내려오고 있었다. 드디어 운명의 반쪽이 나타난 것인가 하는 마음에 견우는 양팔을 높이 벌리며 외계 우주선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기대는 빗나갔고 외계 우주선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열선은 교도소와 함께 견우를 삽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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