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반 관중에게 <비포 미드나잇>은 선댄스 인디 영화인지라 이번 주말에야 전국의 일반 영화관에 개봉되어 한국에 계신 듀게회원님들이 이미 몇 주 전에 다 본 영화를 오늘에야 봤어요. "스포 있음"이라고 쓰기도 사실 조금 민망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사는 미국 중서부의 소도시에는 개봉되지 않아 무려 1시간 30분이나 운전해야 가는 이웃(?) 대학도시에서 봤네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을 개봉관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거의 실시간으로 봤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주인공들(그리고 주연배우들)과 제 나이가 비슷하네요. 그래서 두 영화를 볼 때 제 또래들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고민 혹은 설레는 기대들을 같이 나누는 느낌이었지요. 


<비포 미드나잇>은 세 작품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그래서 가장 웃음을 많이 준 영화였어요. 오픈 크레딧이 올라오긴 전에 시작된 제시와 아들 행크의 공항 장면에서 아들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제시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더군요. 


공항에서 돌아오는 제시와 셀린느가 두 딸이 뒷좌석에서 자는 동안 차 안에서 벌인 대화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두 사람이 나누는 화제가 이웃에 사는 제 딸의 급우 아버지랑 저희 부부가 최근에 대화했던 내용이랑 70%는 일치하는 것을 보고 빵빵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행크가 여름 동안 한 소녀와 로맨틱하게 사귀었고 셀린느가 그 둘이 키스까지 했다는 것을 제시에게 말할 때 진심 소리내서 빵 터졌답니다. 제시의 떨떠름한 반응이 어쩌면 그 급우 아버지랑 똑같던지요. 


미국의 비평가 중 한명이 이 영화가 "painfully honest"라고 하던데 제가 보기엔 "comically honest"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새로운 취직자리에 대한 셀린느의 고민에 많이 공감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자리가 의미있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상주의자인 셀린느에게 꿈의 직업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셀린느는 꿈의 직업조차도 과다업무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7살에 불과한 쌍둥이 딸들의 엄마로서 빡빡한 업무는 더욱 힘들지요. 그래서 그 일을 할지 말지 망설이고 고민합니다. 그런 셀린느의 심정이 거의 백퍼센트 이해되더군요. 


이렇게 자식을 둔 부모의 일상적인 고민거리로 시작된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같이 그리스 휴양지에서 머물고 있는 작가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거침없이 흐르는 시간을 인간이 어떻게 다루느냐"라는 매우 철학적이고 무게있는 주제로 넘어가더군요. 


제시가 같이 휴양지에 머무르고 있는 두 작가들에게 집필중인 세번째 작품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세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선 (1)자신이 보고 겪는 모든 것이 데자부같은 남자, (2)모든 것을 잘 기억해서 새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드문 나이든 여자, (3) 아직 젊은데 모든 것을 아주 먼 미래의 시점에서 보는 남자가 각각 등장한다고 합니다. 제시는 시간이란 결국 인식(perception)의 문제라고 잘라 말합니다. 


인간관계와 세상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저녁식사 장면에서 나탈리라는 고상한 할머니에 의해서 정리됩니다. 할머니는 오랜 시간을 같이 했던 남편을 비교적 최근에 사별한 듯 하더군요. 아직도 죽은 남편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많고 그 기억들을 잃고 싶지 않지만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을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남편의 모습이 구름 속에 갑자기 나타난 태양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름속으로 태양이 숨듯이 그의 모습은 곧 사라져버린답니다. 모든 것은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이고 우리들은 단지 그 사이를 지나쳐갈 뿐(passing through)이라는 말로 저녁식사는 마무리됩니다.


나탈리 할머니의 말은 제시에겐 특히나 아프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제시는 사랑하는 아들 행크가 자신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하루가 다르게 커버리는 것을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아들이 자라는 모든 순간을 함께 하며 지켜보고 싶습니다. 나탈리 할머니는 제시의 그런 부성애가 욕심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일깨워주었지만 아들을 홀로 미국으로 보내고 울적한 제시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죠. 몇년 후면 성인이 되어서 영영 자기 슬하에서 떠나버릴 아들을 조금이라도 더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욕심에 전처랑 아들이 살고 있는 시카고로 이사가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을 셀린느에게 슬쩍 던지고 이 제안은 호텔에서의 두 사람이 벌였던 심각한 부부싸움의 꼬투리가 됩니다.


9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콩깍지가 벗겨진 지 오래전인 제시와 셀린느는 아주 당연하게도 서로에게 차곡차곡 쌓인 불만들이 많습니다. 제시가 셀린느에게 가지는 불만은 주로 행크와 관련이 있지만 셀린느의 경우는 육아와 일을 겸해야 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느끼는 섭섭함과 연관되어 있어요. 따분할 정도로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어요.


두 사람은 아직 서로를 소울 메이트로 여기고 있고 육체적인 끌림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피로함과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한때 싱싱하고 신나는 공감으로 가득차 있던 커플의 지속됨을 위협하고 있지요. 


영화 속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셀린느는 추억(혹은 기억)과 꿈으로 이루어진 시간 속에 살고 싶은 여자입니다. 제시는 그런 셀린느를 이해하고 사랑하지요. 하지만 일상의 피로함 속에 꿈은 고사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추억(아들 행크의 자라는 모습)조차 챙기기 힘들지요. 그런 허탈함 속에서 두 사람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소소한 불만들이 건조하고 편리하기만 호텔방에서 날카롭게 터져나옵니다. 


격렬한 싸움은 제시가 즉흥적으로 읊어나간 80대의 셀린느가 40대의 셀린느에게 쓴 편지로 화해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피로한 일상과 낡아버린 꿈과 나이 들어가는 허무함이 부딪치는 40대의 중년도 나중에는 빛나는 추억으로 남을 거라는 것을 80대의 셀린느가 일깨워줍니다. 


아직 완전히 화해하지 못한 두 사람이 여전히 야외 카페에서 대화를 계속하는 모습에서 영화는 끝납니다. 두 사람은 화해에 성공해서 둘만의 뜨거운 밤을 보냈을까요?


영화 초반에 두 사람의 미드나잇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 지 암시하는 장면과 대사가 나옵니다.


같이 휴양지의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고 있는 스테파노스-아리아드니 부부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중에 칼을 든 채 장난스런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셀린느가 "제발 칼 들고 싸우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지요. 


셀린느의 비명에 아리아드니가 "우린 싸우는 것이 아니야. 협상할 뿐이야 (negotiate)"라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합니다. 그러자 셀린느는 뭔가 한수 배웠다는 듯한 느낌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셀린느-제시 부부도 칼을 든 채 날카로운 협상을 했을 뿐이겠지요.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는 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비포 미드나잇>은 결국 일상의 피곤함에 얹혀진 시간의 무게를 여전히 서로를 아끼는 중년의 부부가 어떻게 다루느냐는 영화였어요. 한여름밤의 꿈 같은 <비포 선라이즈>나 오후의 백일몽 같은 <비포 선셋>처럼 발랄하고 설레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훨씬 더 곱씹을 것이 많은 멋진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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