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없다'는 팬더댄스님 글을 읽고 리플을 달긴 했지만, 좀더 주절주절하고 싶은 화제라 따로 글을 끄적여봐요.

이제 이 글로 '과거 새끼덕후'드립은 끝내겠어요:(...

 

전 어느 쪽이냐 하면 지극히 취미형 인간이었어요. 초중딩시절 한창 만화그리고 판타지 소설 써댈 때의 제 크리에이터적 마인드가

지금 다 어디로 실종됐는지 모르겠는데, 그땐 제가 문학이나 미술에 재능이 있다 굳게 믿었으니 거기에 몰두해 하얗게 불사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어렵지도 않았죠. 그 무렵엔 몰두하는 취미를 진로로 연결시키기 쉬우니까 그만큼 미쳐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학교 다닐 땐 반드시 취미나 특기를 적어내야 했잖아요. 전 늘 독서와 그림그리기를 써냈어요 푸하하하 아웅.....ㅠㅠ

한창 또 아이돌 좋아할 나이였는데, 만화 좋아하는 애가 아이돌에 미치면? 당연히 오빠님들 얼굴을 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BL 좋아하던 애가 아이돌에 빠지면? 당연히...............(왕년에 온라인 팬질 좀 하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니 자세한 설명 생략)

 

아무튼, 그땐 한달에 여덟 권씩 만화잡지를 사제끼고, 회지랑 팬시 만들어서 코믹월드 참가하는 등등의, -지금은 술집에서 자폭성

농담의 떡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일련의 새끼덕후질들을 불살랐었죠. 손에 먹물 묻혀가며 원고용지에 그림 그리고 스캔받아서

포토샵 5.0 시절 마우스 깔짝깔짝 색입히다 고물컴이 렉걸리면 순식간에 날려먹고 마감날이라며 학원까지 원고파일 들고 가서

먹칠..........나 머리카락 먹칠 참 잘했는데........................쓰면서도 내가 정말 그랬단말야? 싶군요;;; 그때의 전 그냥 다른 사람이었나봐요;;;;;

그때 엄마한테 애니고 보내달라고 졸랐지만 대차게 까이고 인문고에 진학하면서 제 새끼덕후 시절은 종말을 고합니다;;;;

 

한편으론 또 책허영 폭발, 중2병을 중1부터 앓기 시작해서 '있어보이는' 제목의 책은 무조건 사기 시작-.-..... '상실의 시대' 라든가.

지금도 자다 하이킥하는, 선생님들이 '지금 뭐 읽니?'라고 물어봐주길 기대하며 교무실 가서 읽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푸하라라랅 나 그거 이해는 했었냐고...'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엔 19금 딱지가 붙어있었는데, 내심 그것도 좀 있어보인다고

생각하며 들고 댕깁니다. BL에 붙은 19금 딱지랑은 좀 달라보이잖아요  일본소설 붐이 막 일기 시작한 때라 요시모토 바나나나

무라카미 류가 지금보다 훨씬 인기있을 때였죠. 은희경이 또 한창 잘 나갈 때였고. 은희경 소설을 읽다 '냉소'라는 단어를 새로 배운

저의 중 2병은 주화입마 수준에 접어들고..............................(이것도 자세한 설명 생략. 그래도 세이클럽은 안다녔어요ㅇㅇ)

 

고등학교에 올라가선 '훗 소설은 어지간히 뗀 듯. 이제 철학서쯤 읽어줘야 하지 않겠솨' 이러면서 지금도 못 읽는 '라깡의 재탄생'

을 엄마님께 생일선물로 푸콰하알아락 그 책을 들고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를 처음 실감했지라...

고등학교땐 오덕질할 시간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끊지는 않았어요, 고등학교때 후르바 애니에 열광하거나 페인터를 익혔으니<-

 

대학 올라가서는, 음. 동슈 501(뭔지 모르셔도 넘어가고 알아들어도 넘어가 주세요)에 빠져서 무려 홈페이지씩이나 운영하며 다시금

썩은 뇌로 팬아트질을 불사르는 한편, 영화 좋아하다 보면 거의들 한 번씩 걸리고 넘어가는 제목허영병, 감독허영병에 걸려서 친구랑

영화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죠. 일주일에 다섯 번은 극장에 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던 영화로는 '라스트 데이즈'나 '더 퀸'...

지금도 나다나 시네큐브, 필름포럼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리스트를 보며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만 예전보다 도전의식이 한결 꺾인지라

'보면 졸 것 같아' 이런 영화는 그냥 넘어가요-_-...근데 분명 예전에 재미 없고 졸렸던 영화들이 지금 다시 보면 괜찮은 게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듭니다.

 

21세에 두번째 연애를 시작하면서 오빠들이랑 빠이빠이했는데, 오랜 팬질이 제게 남긴 건....사람 얼굴은 참 잘 그리게 됐다, 이런거????????

(지금도 매력적인 선의 얼굴을 보면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죠)

 

....또 수다떨다 산으로 왔는데, 포풍같은 제 취미사(史)를 간단히 적었습니다만 아무튼 제 취미는 저라는 인간의 정체성 그 자체였어요.

리뷰같은것도 되게 열심히 쓰고 일기도 매일 쓰고 잡글도 많이 끄적이고 뭔가 화산처럼 안에 있는 걸 꿀렁꿀렁 끄집어내고 발산하고

그랬었는데, 문득 돌아보니 그게 거짓말처럼 휘발되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거예요. 예전처럼 지식욕에 책을 사지도, 탐구심에 가득차

잘 모르는 감독의 영화를 찾아 보지도, 빈 종이만 있으면 습관처럼 뭐든 그려서 채워넣지도 않는. 지금은 늘 사던 카테고리나 모으던 시리즈의

신간을 카트에 담고, 진짜진짜 내키는, 보고 싶은 영화만 봅니다. 한 달에 한 편도 안 볼 때도 있어요. 그림은, 왠지 사이사이 알바나 부탁이 들어와서

그때만 잠깐잠깐. 글쓰는 건 일기쓰며 풀었는데 회사다니고는 그나마 하던 블로그질도 잘 안 하게 돼서 듀게에 글 쓰는게 고작(그래서 이렇게 수다구나).

 

어디서부턴지는 모르겠지만, 그 충만했던 시간에서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분리되어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이식받은 마냥

낯설게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어요.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저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사람이 이렇게 한 번에 무미건조하게

변할 수 있나. 열중하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쉽게 시들해지나. 적어도 그 에너지는 손상되지 않고, 다른 대상에게로 옮겨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어리둥절하기도. 때문에 하루하루 조금씩 퍼석퍼석해지고, 쉽게 낡아가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이 그리 싫지 않다는 게 또 한편으로 걱정된달까.

유화를 더 배워볼까, 다시 제대로 밴드를 시작해볼까, 사놓고 방치했던 기타를 다시 잡아볼까, 했지만 다 그만뒀어요. 그건 예전의 제가 하고 싶어했던

거지, 지금의 제가 하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글쎄- 무취미의 인간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는 뭔가에 다시금 미치고 싶어요. 술과 연애에 미쳤을 때는 그야말로 한 마리 개였지만(지, 지금도

그다지 사람답지는;;;) 르네상스 맨의 꿈을 꾸며 그 꽁무니를 좇을 때의 저는 그나마 정신적으로 건강했었다는 느낌이거든요.

이젠 모든 것이 다 지나갔으니, 시즌 3를 지탱시켜나갈 뭔가를 찾고 싶어요. 사실 이게, 요즘 저의 가장 큰 화두라는 걸 쓰면서 깨달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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