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배리 린든 같은 경우는 다시 다듬어서 리뷰 게시판에도 올렸었네요. 살짝 고쳐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까지도 반말체이군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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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7-


1월 1일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페이퍼문, 웨스 볼의 메이즈러너

1월 4일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


-1. 사실 최근 본 영화가 일곱 개 더 있지만, 한 번에 다 쓰기는 무리일 것 같다. 조금씩 나누어서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지금 쓰다 보니 배도 고파져서 급 줄인 것도 있음. ㅡㅡ;


0. 외지에 나와 개인적으로 가장 벅찬 감동의 순간이 한국 사람들이랑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예상이 엇나갔다. 최근에 우연히 한 터키 사람이랑 짧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한국 사람이라면 궁금한 게 있다면서 김기덕을 아냐고 물어보는 것 아닌가. 정말 무지 반가웠다. 그에게 내가 김기덕을 아주 좋아하고, 그의 영화를 다수 보았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김기덕의 영화에 관심이 많다면서 사마리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재미있게 보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김기덕이 국내에선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편이라고 말해주었고, 그는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김기덕이 한국에서 유명한지를 궁금해 했는데, 나는 유명한 편이며 특히 나쁜 남자 개봉 때의 악명 때문에 유명하다고 말해주었다. 나쁜 남자를 Bad Guy라고 말하니 무슨 작품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김기덕 작품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나쁜 남자를 놓쳤을 리가 없을 것 같아서 대충 내용과 인상적인 장면 설명을 해주었다. 마피아가 여자를 매춘부로 만드는 내용이라고 하니 “아, 그 맨 처음부터 여자가 남자 뺨 때리는 영화?” 딱 알아듣더라.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혹시 영화를 전공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자신이 그저 엔지니어라면서 그런 것과(영화를 전공하는지의 여부와는) 영화 좋아하는 것에는 상관 없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니 자기는 구로사와 아키라랑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특히 좋아한다고 하는 듯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그 이외의 작품은 본 적이 없어서 호응을 딱히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몇몇 작품 경우 굉장히 흥미롭게 보았기에 더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곧 역에 도착해서 그 사람이랑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한국사람 만나서 한국말로 이야기를 한 것보다 더욱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김기덕이 정말 유럽과 외국에서 유명하긴 한가보구나 생각도 들었고, 영화라는 예술의 힘도 느끼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진짜 영화 좋아하긴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1. 1월 1일자 본 영화들은 두 편인데 다 공교롭게도 비행기 타고 가면서 본 영화들이다. 페이퍼문 같은 경우는 예전부터 저런 영화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는데, 항상 찾아볼 노력은 하지 않은 영화였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서 채널을 바꿔대던 찰나, 어느 채널에서 저절로 나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 덕분에 재미있게 관람했다.

  사실 굉장히 단순한 영화다. 이야기도 단순하고, 전개도 단순하고. 어떤 트릭이 다 나올지 뻔히 알만한 마술쇼 보는 느낌? 그래도 나름 마음은 훈훈해진다. 귀엽고 당돌하면서 성숙한 어린 꼬마 아가씨와 대책 없는 아저씨의 부녀 아닌 부녀 관계형성이라는 트릭 자체가, 쥐가 버튼 누르면 치즈 나오듯 보는 사람 기분 좋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다만 보다보니 라이언 오닐의 진짜 딸인 테이텀 오닐이 담배 피는 장면이 꽤 많이 나와서, 저거 진짜인가, 허락을 해준 건가 약간 의아하기도 했고... 무언가 깨름칙한 느낌이 들어 따로 알아보니 막장 아버지인 라이언 오닐이 어린 딸이 큰 상도 받고 인기도 얻어서 질투를 했다더라. 질투해서 뺨 때리는 등등, 라이언 오닐도 참... 참 친아버지란 인간이 찌질하기도 그지 없구만 싶었다. 

  한편을 보고, 짧은 책 한 권 다 읽고, 다시 할 게 없어져서 채널을 뒤지다보니 메이즈 러너가 나왔다. 이 영화는 뭐 내 스타일 전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결말이 나한텐 좀 황당했고, 전체적으로 재미없었다. 다만 한 시퀀스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주인공과 조연 한인 배우 이기홍이 미로를 빠져나오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뛰는 장면. 아 정말 근사했음. 굳굳.


2.

( 이 부분은 격식을 차려 다시 수정. ㅎㅎ)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은 정말 명작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숨겨진 명작. 보고나면 헨델의 사라방드가 계속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스탠리 큐브릭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입지가 굉장히 고유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소설가나 영화가나 예술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일정 정도 자기 반복적으로 창조된다. 왕가위나 홍상수, 김기덕,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등 영화를 만들 때마다 자기만의 특정한 스타일을 창조시켜 변형시키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다. 전체적인 테마가 비슷할 때도 있고, 색감이 비슷할 때도 있고, 화면 잡는 것이 그럴 때도 있고, 특정 정서(여성혐오로 보이는)가 반복될 때도 있다. 아니면 라스 폰 트리에 같은 경우, 영화를 창조해내는 형식이나 방법은 자기가 설정해놓은 삼부작들의 주제마다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게 그 사람이 만든 영화 자체들이 품는 성격 자체가 비슷하기도 하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은 이상스러운 게, 자기 작품들이 다 서로 엄청나게 다르다. 매의 눈이거나 영화공부한 사람이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적어도 나는 그렇다.

  스탠리 큐브릭이 대충 열두, 열세개의 영화를 찍은 것 같은데, 본인이 본인 것으로 셈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스파르타쿠스를 제외한다 쳐도 그의 많은 작품들이 성격이 다르다.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문학으로 있는 작품들을 자기가 고친 적이 많다는 정도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형식으로 시도한 영화들도 장르들과 주제들이 서로 많이 다르다. SF도 있고, 시대극도 있고, 공포영화도 있고, 부부의 불륜을 다룬 것도 있다. 하나의 장르를 다룬 영화를 마치 도장깨듯 높은 완성도로 만든 다음에 다른 장르,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유유히 시작하는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보면 영화계의 모차르트가 현신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다. 이처럼 스탠리 큐브릭이 워낙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고, 그 시도들이 각 영화 장르에 성공적으로 고전이 된 탓에 상대적으로 흥행성적도 약했고, 가장 무난해 보인(?) 배리 린든이 스탠리 큐브릭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묻힌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배리 린든을 보는 내내 나는 딱히 큰 단점을 찾지 못했고, 다만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 뿐이었다. 왓챠 보면 좀 뻔한 스토리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내가 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처럼 인생사 한 편의 꿈이란 것을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한다. 사실 그 영화보다 작품 질은 훨씬 우수하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나 전개 방식은 내 생각에 완벽 그 자체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이 극을 이끌어 나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배리 린든을 맡은 배우가 라이언 오닐인데(라이언 오닐의 '페이퍼문'을 최근에 보기도 했으므로 나는 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연속으로 본 셈이다), 이 욕심 많은 배우가 스탠리 큐브릭한테 주인공보다 대사가 훨씬 많은 내레이션도 자기 시켜달라고 징징대서 스탠리 큐브릭이 분노하여 다신 배우로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다. 어쨌든, 이 내레이션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을 가리지 않는다.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불행한 결말을 몇 번 정도 암시하며, 절대적인 서술자마냥 모든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는 자못 오만한 어조를 취한다. 이 내레이션의 어조는 시대극을 고집한 스탠리 큐브릭의 의도에 적확하며, 그 준엄하고 귀족적인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상당히 옛스러운 시대를 산 한 남자의 불운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도록 이끈다.

  이 극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를 다루는 이 영화의 시선이고, 내레이션의 차가움은 바로 그러한 시선을 반영한다. 배리 린든이라는 남자의 인생 자체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영화의 독자적인 시선이 배리 린든의 인생을 해석함에 따라 그의 인생을 다룬 이 이야기도 자못 신선해진다. 배리 린든의 이야기는 크게 전기, 후기로 나누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전기에서 배리 린든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순결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잃고 방랑하여 군에 입대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순정남이었던 그는 무참한 세월 속에서 점차 초기의 순진한 마음을 잃고, 여차저차 귀족부인의 환심을 사 결혼하여 부자가 된다. 변질하여 다른 사람이 되는 배리 린든의 모습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고로 이중적이 된다. 관객은 전기에서는 배리 린든의 고초를 마음 아파하며 그가 방랑생활을 접고, 무사귀환하기를 응원한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후기에서 배리 린든의 질 나쁜 행동에 질색하며 얼른 양아들이 그를 징벌하기를 바라게 된다. 스탠리 큐브릭은 인물의 이러한 변질에 어떠한 드라마적 감상도 배제하고, 그의 몰락 역시도 차근차근 전개해 나간다. 내레이션은 정말 배리 린든이라는 인물의 삶에 대해 어떠한 동조적 감정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대충 결말을 암시 받았더라도, 관객들은 도대체 어떻게 배리 린든이 몰락하는가에 초유의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관객이 궁금증에 안달복달하더라도 내레이션은 여유로움으로 가득찬 신사마냥 이죽거리며 뜸을 들이다가는, 결국 최후에 가서 그의 처절한 몰락을 이때껏 그래왔듯 한껏 무관심하게 서술한다. 내레이션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참하게 마차에 올라타는 배리 린든의 뒷모습을 보며 관객은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꿈 같으며, 사람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또 변할 수 있는지를 영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배리 린든의 영화 장면들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인조광 하나 없이 자연광으로만 찍었기 때문에 모든 장면들이 굉장히 섬세하게 아름답다. 흡사 유럽의 옛그림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호화스러운 실내 장면보다 자연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내는 (구름부터 바닥의 땅까지) 장면들이 정말 잘 찍은 사진처럼 아름답단 생각을 했다. 스탠리 큐브릭 본인이 사진작가로 시작했기 때문에 장면미학에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영화 일에 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어두운 곳에서 촛불조명으로만 영화를 찍기 위해 나사에서 직접 카메라 장비를 빌렸다고 하는데, 그 행위가 좀 지나친 오버 아니냐는 몇몇 사람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본 장면들(어두운 곳에서 카드 게임하는)은 실제로 정말 아름답게 찍혔다. 그 시대의 의상분야에 관심이 없는지라 자세히 말은 못하겠지만 고증에도 충실한 것 같아 보였다. 인물들의 하얀 분칠가루가 그 정도로 진하게 발라진 영화를 본 기억이 잘 들지 않는다. 그러한 분장술조차도 그 시대의 아름다움을 포획하기 위해 들인 스탠리 큐브릭의 공이 아니었나 싶다.

  음악에 대해선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헨델의 사라방드가 얼마나 아름다운 음악인지 깨닫게 된다. 나도 요즘 만날 듣는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이 그의 여러 작품에 클래식을 쓴 걸 생각해보면 그가 그 분야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이렇게 시의 적절하게 음악을 쓸 수가 있나 싶을 정도. 헨델이 아마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를 보았으면 매우 흡족해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스탠리 큐브릭 본인의 감각이 아니라면 스탠리 큐브릭이 같이 일한 음악감독이 훌륭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이 분야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 더 이상의 언급이 흔들지만 알려진 감독의 성격상 전자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한다.


-성실한 영화일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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