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담배를 피운 날

2010.06.07 18:04

차가운 달 조회 수:7132





제가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던 날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네요.
하루는 친구놈 집에서 방바닥만 긁고 있었는데
둘 다 머릿속엔 전자오락을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때 제가 빠져 있던 게임은 스페이스 해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3차원 슈팅 게임인데
용을 타고 막 날아다니면서 레이저를 갈겨대는 겁니다.
아주 신났죠.

친구놈이 좋아했던 게임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놈도 오락을 꽤나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블리자드의 노예가 되어 열심히 와우를 하고 있죠.
니 인생을 구제하는 길은 로또밖에 없다, 그러면서
제가 매주 전화를 해서 로또를 샀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놈이 문득 정색을 하고서는 할 말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뭔 소린가 들어봤더니 오락을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돈이 없으니 어떡하냐,
그러니 밖에 나가서 애들 돈을 뺏자고 하는 겁니다.

애들 돈을 뺏는다...
물론 저처럼 고결한 사상을 가진 인간이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얘기였죠.
하지만 어떡합니까.
스페이스 해리를 하고 싶은데...
용을 타고 막 날아다니면서 레이저를 쏘고 싶은데...

저는 그래 좋다, 오늘만 하고 손을 털자고 했죠.
그래서 둘이 원정을 나서려고 하는데 이놈이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러는 겁니다.
야, 근데 넌 진짜 너무 순진하게 생겼다.
임마, 넌 웃기게 생겼어.
아무리 봐도 저희 둘을 보고 애들이 겁을 먹을 것 같진 않더란 말이죠.

그래서 고민을 한 끝에 저희는 담배를 사기로 했습니다.
애들을 붙잡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피식 웃고 가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죠.
일단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그건 비주얼적으로 어느 정도의 불량기가 보장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얼굴에다가 담배 연기를 한 번 뿜어주면 더더욱 효과적이겠죠.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고 둘이서 가진 돈을 탈탈 털었습니다.
딱 담배 한 갑을 살 정도가 되더군요.
오늘 만큼은 애들 돈을 뺏어도 좋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아버지 심부름이라면서 담배를 샀죠.
그때는 지금처럼 엄격하게 따지던 시절이 아니었거든요.
라이터는 아마 친구놈 집에서 뒹구는 걸 하나 들고 왔을 겁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저희는 장소 물색에 들어갔습니다.
친구 동네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 나중에 곤란할 수도 있으니까 조금 떨어진 동네로 가기로 했죠.
뭐, 돈도 없으니까 한참을 걸어서 옆 동네로 갔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골목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죠.
그날따라 이놈들 어디 한번 죽어봐라 하고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다니다가 마침내 적당한 장소를 찾았어요.

어느 여고 담벼락을 따라 길게 뻗은 골목이었는데 꽤나 한적한 곳이었죠.
친구와 저는 주택가 골목 쪽에 숨어서 잠복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도로가 있는 쪽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정말 사람이 안 다니더라구요.
어쩌다 아저씨, 아줌마들은 한 명씩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돈 여기 있다, 하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애들은 안 지나가더란 말이죠.

슬슬 인내심도 바닥이 날 무렵,
벽에 붙어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친구놈이 갑자기 야, 야, 온다 준비해라, 그러는 겁니다.
슬쩍 보니 저쪽에서부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애들 몇 명이 다가오고 있더군요.
저는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담배를 꺼내고 한 개비를 입에 물었죠.
그리고 친구놈에게도 한 개비 건넸습니다.
저희는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콜록,
아무 생각없이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인 담배는 제법 맵더라구요.
야, 그냥 살짝 빨았다가 뱉어야지.
친구놈 말대로 그냥 입에서만 살짝 빨았다가 내뱉으니 괜찮았어요.

마침내 먹잇감이 눈앞으로 지나가는 순간,
친구도 저도 담배만 뻐끔뻐끔 빨아댈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죠.
아, 이럴 수가...
정말 귀여운 애들이었어요.
초등학교 삼사 학년은 되었을까?
서로 손 잡고 랄랄라 랄랄라~ 노래만 부르면 스머프처럼 보일 듯도 한 그런 귀여운 꼬꼬마들...

저희는 그냥 담배만 입에 물고 그 애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만 바라보았죠.
야, 아무리 그래도 저런 애들 돈을 어떻게 뺏냐?
그래, 애들이 뭔 돈이 있겠어.
저는 담배를 껐어요.
아무 맛도 없고 그냥 입 안에 텁텁한 느낌만 남았죠.
그게 제가 처음으로 피운 담배였네요.

이쯤에서 끝났으면 그다지 기억에도 남을 것 같지 않은 그런 날이었는데...
날도 덥고 기다림에 지치기도 지쳐서 저희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죠.
여고 담벼락을 따라 길게 뻗은 골목을 걷는데
저 앞에서부터 분명 저희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형들 네댓 명이
마치 영웅본색의 한 장면처럼 유유히 걸어오고 있는 게 보이는 겁니다.
저는 딱 보는 순간 알았죠.
이거 이대로 걸어가다가는 삼류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그런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야, 야, 우리 다른 길로 돌아가자.
친구에게 말했더니 이놈이 뭔 소리를 하냐고 성질을 내듯 말하네요?
그대로 가자, 뭐가 무섭다고 피하냐,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어쩌고저쩌고....
하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포식자라고 생각했던 놈이었으니.

하지만 저는 걸어가면서도 분명히 알았죠.
앞에서 걸어오는 형들이 풍기는 포스가 범상치 않았거든요.
이건 반드시 일어난다, 결국 삼류 영화의 한 장면을 찍게 될 것이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어느 순간 옆으로 그냥 지나치는가 싶더니만
역시나 뒤쪽에서 어깨를 탁 붙잡더군요.
왜 꼭 이런 놈들은 비겁하게 뒤에서...

벽 쪽으로 친구랑 저를 밀어붙이면서 뭐라뭐라 지껄이는데
사실 전 하나도 안 무섭고 그냥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죠.
이건 뭐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행동하는 그 형들이 대견스럽게 보이기까지 했으니까요.
물론 가슴팍을 한 대씩 얻어맞은 뒤에는 웃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죠.

아니, 그런데 전자오락 하고 싶어서 애들 돈 뺏으러 나온 놈들이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나온 게 담배 한 갑과 라이터.
담배를 보더니 지들끼리 낄낄거리고 웃더군요.
담배는 뺏기고, 담배 피우면 뼈 삭는다는 친절한 덕담까지 들은 뒤에야
저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뭐, 철없던 시절이라 자기가 하려던 짓은 생각지도 않고 그 형들 욕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딱 두 개비밖에 안 피운 그 담배가 어찌나 아깝던지...
어쨌거나 두 사람의 전 재산이었는데...

그 뒤에 제대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네요.
돈 뺏으러 원정 나갔던 친구도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친한 친구가 또 한 놈 있는데
하교길에 가끔 그 친구의 사촌형이 사는 아파트로 놀러가곤 했어요.

그 형은 재일교포였고 학교 때문에 서울에 있었죠.
그 아파트에는 재미있는 게 꽤 많았어요.
일본 문화가 본격적으로 개방되기 전인지라 처음 보는 물건도 많았고,
일본 만화도 제법 있었죠.
일본어는 하나도 모르지만 재미있게 봤던 만화도 있었네요.
미쉘인가 하는 고양이가 나오는 만화였는데 글자는 없고 그림만 있는 만화였거든요.
아파트에 갈 때마다 그 만화부터 찾아서 보고 그랬죠.

하루는 그 형은 없고, 친구랑 둘이서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고 아파트를 열심히 뒤지다가
서랍에 가득한 필립모리스 담배를 발견했어요.
필립모리스? 피천득의 수필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 담배였어요.
피천득이 잉그리드 버그만을 좋아하는데
그녀가 피우던 담배가 필립모리스라서 자기도 괜히 한 대 피워봤다는 그 담배.
그 담배를 한 갑 들고나와 어두운 놀이터 한쪽에서 피워봤죠.
아, 그런데 이건 정말 담배가 맛있는 거예요.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입 안에 감기는 그 특유의 맛에 전혀 거부감이 안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부터 담배를 피우게 되었네요.
그 형은 자기 서랍에서 담배가 한 갑씩 없어지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5월 31일 세계 금연의 날을 맞아 이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때 게시판이 정상이 아니라서 못 올렸네요.

참, 그 친구랑 얼마 전 술을 마시다가 그 형 얘기가 나왔는데
녀석이 문득 한 가지 고백을 하더군요.
그때 그 형이 동거를 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역시나 재일교포였고 꽤나 예뻤죠.
친구놈이 하는 말이, 한 번은 그 누나의 팬티를 훔친 적이 있다고 하네요.
그 얘기를 듣는데 한숨이 나오더라구요.
후, 너 그런 놈이었냐?
뭐야? 넌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미쳤어? 여자 팬티를 왜 훔쳐?
예쁘잖아.
네, 그러고 술 마셨습니다.
제 주위에는 아무래도 이상한 놈들이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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