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토요일에 작성된 것인데 하루 지나서 이 곳에도 올립니다. 그걸 감안하고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루세 미키오 예찬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일본의 거장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내일이면 이 특별전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오늘과 내일 상영되는 여섯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루세의 영화의 진수를 맛보며 나루세의 위대함을 느끼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나루세의 유작이자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흐트러진 구름> 한 편만 보더라도 별로 아쉬울 건 없다. <흐트러진 구름>을 보는 도중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서 후반부에 등장하는 자동차 시퀀스만 유심히 보더라도 그 영화를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시퀀스 하나가 나루세의 영화 세계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특별전 기간이 고작 이틀 남았다고 해서 나루세 영화를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 절대로 늦지 않았다!

내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002년에 서울시네마테크에서 주최한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에서였다. 그때도 나루세 영화의 훌륭함을 느끼고 나루세를 좋아했었다. 그 이후로도 나루세의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재관람을 해왔다. 그렇게 나루세의 영화들을 계속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특별전때만큼 큰 감흥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나루세의 영화를 주변에 추천하지 않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직무유기이며 거의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진작 <흐트러진 구름>에 관한 글을 써서 올리고 그 영화가 매진되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나 사정상 아직까지 그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특별전이 끝날 때가 다 되었고 나는 이대로 특별전이 끝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아쉬운대로 몇 자 끄적이자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이 글의 목적은 간단하다. 이틀 동안 단 한 명이라도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도록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차후에 나루세 미키오에 관한 글을 제대로 써서 반드시 올릴 생각이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 나루세 영화의 위대함을 문자로 전달하는 것이 나에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시도해보기로 한다. 이틀 동안 상영되는 여섯 편의 영화 제목으로도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핵심적인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섯 편의 영화는 다음과 같다. <번개>, <부운>, <흐르다>, <산의 소리>, <흐트러지다>, <흐트러진 구름>. '번개'가 치는 것과 같은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찰나의 순간이 인물들간의 관계 속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해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나루세 미키오의 장기이다. 따라서 나루세의 영화를 볼 때에는 사소해보이는 인물의 몸짓 하나, 그 인물이 공간 속에 놓여있는 각도와 위치 하나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위의 제목을 보면 '흐르다', '흐트러지다'와 같은 상태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 역시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마음의 행로를 찍는 감독이다. 나루세의 영화를 보면 말 그대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 마음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가운데 흐트러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의 흐름이라는 것을 나루세는 어찌나 유려하게 연출해내는지 마치 편집이 없이 만들어진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들 정도이다. 마음의 흘러감이 정념과 결합될 때 나루세만의 세련된 멜로드라마가 비로소 탄생한다. '산의 소리'라는 문장이 느끼게 만드는 정서가 있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 속에서 무드를 만들어내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를 발휘한다. 한 공간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공간을 밝히는 등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나루세는 그러한 단순한 몇 가지 재료들만 가지고도 드라마의 맥락에 맞는 분위기와 정서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낸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말한다면 '시선'이 될 것이다. 인물들, 특히 남녀가 주고 받는 시선이 대표적이며 그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고 드라마를 진행시키기 위해 인물들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있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시선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나루세는 시선 하나만 가지고도 영화 한 편을 찍을 수 있는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루세의 영화를 볼 때 시선을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그만큼 나루세 영화의 비밀은 감추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선을 매개로 진행되는 영화이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나루세의 영화에는 서스펜스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인물들이 주고 받는 시선은 무엇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데 있어서 용이하게 작용할 수 있는데 그 감춤과 드러냄의 메카니즘은 서스펜스를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늘 일정 부분은 감추어져 있고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나루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기에 그 또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에 유리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나루세의 영화는 그러한 이유로 서스펜스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아내의 마음>은 서민극을 빙자한 스릴러라고도 볼 수 있으며 <흐트러진 구름>은 '서스펜스 멜로'라는 말을 붙여도 무방할 정도로 서스펜스적 요소와 멜로적인 요소가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루세는 말년에 <여자 안의 타인>, <뺑소니>와 같은 서스펜스 스릴러를 실제로 연출하기도 했다. 시선의 서스펜스를 구사한다는 측면에서 나루세는 언뜻 보기에 그와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한 감독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히치콕이 사건을 중심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간다면 나루세는 사건이라고도 정의하기가 애매한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 서스펜스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본다면 나루세 미키오는 히치콕적인 서스펜스를 일상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와 서스펜스의 관계는 흥미롭기 그지 없으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연구 영역이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은 말이 여전히 많이 있지만 아쉽게도 시간 관계상 글을 마쳐야 할 것 같다. 나루세 미키오만큼 세련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정말 드물다. 일본의 후배 감독들로 따지자면 마스무라 야스조, 요시다 기주가 보여주는 모던함을 나루세의 영화들이 이미 선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앞으로 나루세 미키오에 대해 더 얘기를 해보고 싶다. 특히 내가 이번 특별전을 통해 가장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서스펜스의 대가로서의 나루세 미키오이다. 앞으로 이러한 측면에서 나름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연구해보고 싶다. 오늘과 내일 상영되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모두 세계영화사에 남을 만한 걸작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급하게 몇 자 끄적이느라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어보이는 이 글이 이 글을 읽는 사람의 선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가능한한 많이 챙겨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한 편만 고른다면 <흐트러진 구름>을 초강추하고 싶다. 그럼 이만 부족한 글을 마친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P.S: 나중에 글을 수정해서 내용을 더 추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 시간표
(장소: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www.koreafilm.or.kr)
무료 상영이고 맥스 무비에서 예매 수수료 1000원을 내고 예매가 가능하다.

3월 6일 (일)

오후 2시 산의 소리
오후 4시 30분 흐트러지다
저녁 7시 30분 흐트러진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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