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별일은 아닌데 그냥 제가 기뻐서 적어봤어요. 다른 곳에 먼저 올려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까 양해 부탁드려요.)

 

어제 국내에 유명한 석학이 잡지에 실릴 대담을 하는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대담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에 그 석학에게 질문을 하셨던 교수님이 우리 나라가 OECD 국가 중 수년째 자살률 1위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국내에서 1년에 200건이 넘게 존속 살인이 일어난다고 하셨다. 자살률 1위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서구 학계에서 국내 통계 자료를 보고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률이 높은 것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무척 궁금해하며 그 교수님께 질문을 한다는 말씀이 좀 충격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뭔가 슬픔이 밀려와 울컥하면서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행과 헤어져 안국역에서 전철을 타려고 하는데 한 청년이 계단을 올라오다가 걸려서 앞으로 '쿵'하고 넘어졌다. '조심 좀 하지'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나는 그냥 내려가려고 했다. 내가 왜 고개를 돌렸는지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뒤로 고개를 돌렸더니 그는 일어나기는 했으나 다시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는 술에 많이 취해 있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한양대역 근처라고 했다. 밖은 무지 추웠고 그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양대역에 있는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마음 먹었다. 한양대역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물어보니 삼성역에서 회식이 있었는데 안국역으로 또 누가 불러서 가는 도중이라고 했다. 그럼 다시 원래 가던 곳으로 가야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에게 물었더니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한양대역으로 가던 도중 그는 구토를 했다. 그는 한양대역 근처 고시원에 살고 있었다. 고시원 문 앞에 왔을 때 그가 고맙다고 해서 나는 솔직하게 나도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마도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마음을 주신 것 같다고 했다. 가족과 떨어져 조그만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를 보면서 뭔가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그 청년과의 일이 나로서도 좀 특별한 순간이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기에서 밝힌 적도 있지만 나는 주변에서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평가받는 사람이고 평소에 어제와 같은 행동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도 내가 어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몇 가지가 떠오른다.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OECD 자살률 1위에 대한 충격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런 얘기를 막 듣고 나온 상황에서 도저히 그 청년을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양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자살률과 그 청년은 직접적인 관련은 전혀 없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 청년을 내버려뒀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 청년을 집까지 데려다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 것이다. 다만 내가 평소답지 않게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순간적으로 저 상태로 그 청년이 밖에 나갔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를 떠올려보자면 하나님이 나에게 그 청년을 도우라는 마음을 주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다가 보니 한가지가 더 떠오른다. 최근에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이 겨울이 왔는데 외투를 살 돈도 없어서 괴로워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 앞에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고 그를 고민 끝에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먹이고 함께 사는 내용이 나온다. 마지막에 가면 그 소년은 하늘로부터 쫓겨난 천사였음이 밝혀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 톨스토이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건 '사랑'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변이 곧 '사랑'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었는데 어제 내가 한 행동이 이 책의 영향 때문이었다면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일 것이다. 책의 영향력을 실감한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앞의 추측은 다 틀리고 단순히 나의 오지랖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행동의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고 기쁘고 감사하다는 것이다.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경험해보면 참 기쁜 일인데 왜 평소에 그러기가 힘든 걸까. 평소에는 왜 그걸 귀찮은 일로 생각하는 걸까. 왜 평소에는 나밖에 안보이는 걸까. 어제 일을 계기로 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더 알아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청년은 지금 따뜻하게 잘 자고 있겠지. 나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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