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 먼저 올려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현재 서울아트시네마(www.cinematheque.seoul.kr)에서 국내 회고전 사상 가장 큰 규모의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이 회고전은 11월 23일까지 계속된다. 이 회고전에 좀 더 많은 관객들이 왔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솔직히 나에게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좋은 영화를 나 혼자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국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서울아트시네마 소식지에 이미 올리베이라에 대한 두 개의 좋은 글(http://trafic.tistory.com/m/post/1102 , http://trafic.tistory.com/m/post/1103)이 실렸으므로 올리베이라에 대한 자세한 이해는 그 글을 통해서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씨네21에 실렸던 올리베이라에 대한 한창호 영화평론가의 글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그냥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보고 느낀 점에 대해서 써보기로 하겠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는 1908년생으로 현재까지 100살이 넘도록 영화를 만들고 있는 포르투갈의 거장이다. 영화 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의 한 명이기도 하다. 내가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강력히 추천하는 이유는 그의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진귀한 영화적 체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보는 감동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이건 그냥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 흔히 우리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스펙터클과는 차원이 다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말'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 인물들의 대사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 대사량에 질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의 압박감을 견뎌내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가 펼쳐진다. 올리베이라는 "영화는 연극을 포착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는데 그런 만큼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연극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촬영된 연극'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실 연극을 고정된 카메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담지 않는 이상 쇼트로 분절된 영화적 형식 안에서 연극을 경험하는 것은 보통 무대에서 상연되는 연극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말이 이미지와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효과는 오로지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이미지와 말의 충돌이 빚어내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단순히 내러티브의 종속적인 요소가 아니라 말을 말 자체로 온전히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 올리베이라의 영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리고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의 '말'은 문학, 음악, 회화, 연극 등 다른 예술과 만나면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의 연극성은 종종 연극을 연극으로서만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집으로 간다>에서처럼 연극과 삶의 관계를 탐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시선의 불일치와 내레이션 기법을 이용한 브레히트적 거리두기를 통해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영화의 매체성을 성찰하게 만들기도 한다. 올리베이라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올리베이라의 영화에 매혹된 이유 중의 하나가 카메라의 부동성이었다. 발화하는 인물들을 포착하기 위해 정지된 카메라가 유용했을 수는 있겠으나 올리베이라가 정지된 카메라를 선호하는 것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작품들에서 올리베이라는 정지된 카메라로 대상을 포착한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보면서 카메라의 운동성에 대한 부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때 움직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의 사물이나 풍경의 표정도 매우 인상적이다. 마차의 바퀴나 부채, 촛불, 배가 지나가는 모습 등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순간 특별한 존재감을 얻게 된다. 가령 <절망의 날>에서 마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마차의 바퀴만을 몇 분간 보여주는 방식으로 묘사하거나 카밀로 카스텔로 브랑코의 묘지에서 흔들리는 촛불을 보여줄 때 바퀴와 촛불은 단순히 일상의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영화의 맥락 안에서 미묘한 함의를 띠게 된다. 묘지에 있는 촛불은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브랑코의 운명을 떠올리게 만든다. <세브린느, 38년 후>에서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세브린느와 잇송의 식사 장면에서 그들 사이의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촛불은 그 촛불을 그 장면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살짝 살짝 흔들리는 촛불은 세브린느와 잇송의 수십년만의 재회의 어색함과 그로 인한 긴장감을 미묘한 방식으로 시각화하며 호텔 방의 조명이 촛불만 남았을 때 세브린느와 잇송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며 그들 사이의 비밀스런 내면을 드러내게 만든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수수께끼>의 마지막 쇼트에서 배가 지나가는 모습은 단순히 현재의 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콜럼버스의 배까지 상기시킴으로써 이미지의 의미가 확장된다. <게보와 그림자>에서 시종일관 테이블에 놓여져 있는 등이나 <금발 소녀의 기벽>에서 여주인공이 들고 있는 중국 부채가 자아내는 야릇한 매혹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단순한 사물이나 풍경이 사실은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그 이미지들의 잠재된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올리베이라의 영화들은 보여준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어떤 주제를 다룰지라도 우아함을 잃는 법이 없다. <나는 집으로 간다>만큼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우아한 필치로 노년의 고독을 그려낼 수 있는 감독은 드물 것이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부조리극이든 내용과 상관없이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항상 우아한 품격을 유지한다. 올리베이라의 영화 한 편의 쇼트의 개수는 일반 영화보다는 적은 편이다. 대화 장면에서 하나의 쇼트를 길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올리베이라의 영화 속에서 신중하게 선택된 이미지들은 큰 감동을 준다. 올리베이라는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된 이미지들보다는 제한된 몇 개의 위치에서 포착된 이미지들을 선호한다. 인서트로 등장하는 풍경 쇼트의 경우에도 동일한 앵글에서 낮과 밤을 교차하는 식이다. 이미지를 절제한다는 것은 수많은 이미지들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제한된 앵글로도 얼마든지 세계를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런 결정은 불가능하다. 그런 믿음 하에 엄격하게 선택된 올리베이라의 영화에서의 이미지들은 어떤 숭고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올리베이라만큼 간결하고 순화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그는 로베르 브레송이나 칼 드레이어를 연상시킨다.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과연 이미지를 마구 나열하는 것이 세계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미 '좌절된 사랑의 4부작' 중 <베닐드 혹은 성모>, <프란시스카>와 <편지>, <나는 집으로 간다> 등 올리베이라의 대표작들의 상영이 끝났지만 오늘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걸작 <불운의 사랑>을 비롯해서 개인적으로 올리베이라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 계곡>, <불안>, <과거와 현재>, <지배의 공허한 영광>, <게보와 그림자>, <세계의 시초로의 여행>, <앙젤리카의 이상한 사례>, <아니키 보보> 등 많은 작품들의 관람 기회가 남아 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 스크린에서 보기가 쉽지 않은 올리베이라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화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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