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열병처럼 짝사랑했던, 무려 대학에 들어가서도 한동안은 시름시름 병처럼 좋아했던 선배의 사진이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이 고대유물과도 같은 사진이 어찌하여 여기 있단 말인가!!


(라곱순님의 짝사랑 이야기를 훔쳐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아랫글에서 운명 같은 사랑, 운명적 만남에 대한 글이 있던데 17살 저는 그랬어요. 그 선배를 처음 봤을 때 심장 뛰는 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릴 지경이었으니까요.

개교이래 처음으로 학교에서는 교지를 발행하겠다고 일본어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었어요. 뜬금없는 성격이셨던 선생님의 랜덤 선발에 저도 그 선배도 있었던 거죠.

대체 기준이 뭐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각 반에 한 명씩도 아니고, 담임 추천도 아니었던 것 같고... 무튼 방송을 듣고 모여든 인간들 보니 응? 나는 왜 여기? 내가 왜? 이런 생각이 들었었죠.


그런데 그때, 거기에 뽀얀 피부에 뿔테안경을 쓴 선배를 발견한 거죠. 한 학년에 4반뿐인 작은 고등학교였던 지라, 그리고 대부분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 건너 알고 있는 사이가 대부분인데

그 자리에서 얼굴을 인식하기 전에는 전혀 만나본 적 없는 얼굴이었어요. 그렇치만 그 얼굴이 두둥, 하고 임팩트있을 수 있었던 것은 외모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니에요,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바로 며칠 전, 그 선배가 속한 만화동아리에서 발간한 회지를 야자 시간에 봤던 것이에요. 거기에 아~~~주 시니컬하게 학교를 비판하는 글과 그림을 그려넣은 사람의 이름을 곱씹었단 말이죠.

 

-이 사람 누굴까? 와, 이건 정말 지독하게 강렬한데. 

-아, 그 선배가 동아리 회장이야. 우리동네 사는데 만화 잘 그리는지 몰랐네. 근데 좀 끔찍하긴 하다.

-그러게. 그렇긴 하네.


그렇게 친구랑 라면을 우물우물 먹으며 대화를 했었더란 말이에요. 바로 며칠 전.

그리고 난생처음 들은 이름을 머리에 슬며시 들여놓았는데 여기에서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데 뎅~! 종소리가 울렸는지, 귀가 먹먹해졌는지, 그 이름과 실체가 하나로 겹쳐지는 그 순간,

이성이 마비되면서 엄청난 속도로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교지발간을 위한 아이디어 회의 및 원고 심사, 추후 교정 모임까지, 수시로 수업도 종종 빼먹고 야자는 아주 밥 먹듯 빼먹으면서 편집위원들은 모였어요. 

구성원들이 다 너무 유쾌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척하면 척! 합이 맞는 분위기였어요. 사심이 듬뿍인 저는 뭐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죠. 그 선배만 빤히 바라보고 있을 까봐 머릿속으로는 제 뺨을 찰싹, 때리는 상상도 했어요. 정신차려! 응!


그렇게 교지를 위한 실제적 시간은 채 3할이나 되었을지 싶은데 우리는 모여 학교에서 대준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가끔은 숙직실에서 뒹굴뒹굴하기도 하고,

난로에 불량식품을 구워먹기도 하고, 재미나게 놀았어요.


그러면서 이 선배와 참 많이 가까워졌었죠. 서로 저녁에는 통화도 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당시는 삐삐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아, 연식이 나온다;;;)

공중전화, 그래요 그때는 공중전화에서 뒤에 기다리는 사람 없을 법한 후미진 공중전화에서, 이런 사적인 통화를 해야 했죠. 방바닥에 누워서 모바일로 까톡 날리는 지금과 참 격세지감이로군요.

집 전화가 있다 한들, 부끄럽게 어떻게 이런 통화를 집에서 하나요. 다행히 그 선배는 무선전화를 들고 방으로 틀어박혀 통화하는 것에 대해 그닥 제한이 없는 분위기여서 비교적 오래 통화를 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함정은, 알게 된 초반에 이미 이 선배가 짝사랑하고 있는 언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상한 오해로 이 선배는 내가 다른 오빠, 게다가 무려 자기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아 너무 클리쉐 돋게 짝사랑의 정석이죠. 제 또래 중 짝사랑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불러봤을 바로 그 <인형의 꿈>이죠. 한걸음 뒤엔 항상 내가 있었는데~ 


무튼 저는 이 '오해'를 적당히 이용합니다.

제가 자기 친구를 좋아한다고 본인이 오해하고 있으니 저는 대 놓고 그 선배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했던 것이죠.


밤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랬어요 전.


-나 오늘, '그 사람' 봐서 너무 행복했어. 웃는 것만 봐도 너무 좋아~

-걔가 그렇게 좋으냐? 참...너도...

-응, 너무 (네가)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은데. 가끔 숨도 막혀. 나도 잘 이해가 안되지만...

-내가 다리라도 놔 주랴? 

-오빠가 다리를 놔준다고? 푸하하하하, 그 말 나중에 후회할걸?

-내가 말 잘해줄게. 

-그래, 나중에 오빠 도움이 좀 필요할 때, 그 때 이야기 하자. 그 때 말 '잘' 해줘. (크큭)




아, 쓰다 보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네요. 그때의 그 폭풍감성은 다시는 느낄 수 없겠죠? 선배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 눈빛 한번에 천국과 지옥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던 시절.

비록 사귄 건 아니지만, 그 나름으로 저에겐 참 좋은 추억인데 상대방은 어땠을는지 모르겠네요. 성인이 되어 같이 술 한잔하면서 나야 고마웠었지, 하긴 했는데. 솔직히 좀 불편했을 것도 같아요. 




그나저나 증명사진 속의 꽃 아가는 지금 보면 볼때기 잡고 양옆으로 흔들어 주고픈 사진이네요. 제가 사랑에 빠졌던 17살 때 그 선배는 18살. 그러나 그 사진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찍은 앳된 얼굴.

당시는 어둠의 포쓰를 팍팍 풍기며 인상 가끔 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 아가처럼 귀여웠던 사람이란 걸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더니 더 사랑이 증폭되었던 것 같아요. 무엇인들 안 그랬겠냐만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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