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무서웠던 어떤 일.

2010.09.25 23:38

나미 조회 수:3247

길눈이 밝다고 자부합니다. 실제로 그런 소리도 들었습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것도 잘하지만, 한번 갔던 길은 절대 헷갈린 적이 없어요. 방향감각도 좋고 동네에 지형지물을 잘 기억하거든요. 다른 데에는 별로 관찰력이 좋지 못한데, 길 찾을  때에는 그 골목에서 가장 특징적인 걸 한눈에 집어내서 기억하는 능력이 좋은 편입니다. 갈림길에서 제가 찍은 곳은 다 목적지로 향할 때가 많구요. 시험을 칠 때랑은 전혀 정 반대입니다-_- 아무튼 이런 것 때문에 모르는 동네에서도 겁먹지 않고 산책을 즐기는 게 제 취미예요.

 

추석 전 주말이었습니다. 모종의 일로 한동안 우울함에 빠져서 좁은 방 안에서만 뒹굴거리니 머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먹고 움직이지를 않으니 속도 거북하고.....저는 그때 밤 12시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산보를 다녀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집을 나섰습니다. 제가 사는 건물 바로 뒤에 야산이 하나 있어요. 별로 높지 않은 동네 뒷산이라 사람들도 운동삼아 많이 다니는 곳이었습니다. 방에서 나온 저는 일단 산을 올랐어요. 제 계획은,

 

방 옆의 산 입구(지도상 동쪽)로 오른다->산을 반 바퀴 돌아 반대쪽 출구(지도상 서쪽)로 내려온다->골목길을 통해 천천히 동쪽으로 향해 산책한다->귀가

 

였지요. 예전에도 저 비슷하게 걸어 본 경험이 있었고, 거기에 비추어 보건대 소요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쯤? 다녀오면 저녁 8시쯤 될테니, 그때부터 바짝 하면 마감도 맞추고 한결 개운한 기분으로 잠잘 수 있을 것 같았지요. 벌써부터 날이 어둑하게 저물고 있었습니다만 산을 타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반대쪽 출구로 내려오니 방을 나섰을 때 시간으로부터 20분이 흘러 있더군요. 정말 낮은 산이거든요!

 

내려온 곳도 예전에 이리저리 걷다가 한번 와 본 곳이었습니다. 이대로 집에 가면 한 시간은커녕 삼십 분만에 도착하겠더군요. 어쩐지 아쉬워져서 저는 (방이 있는)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더라구요. 하지만 뭐, 낯선 곳이래봤자 죄다 주택가고 사람들이 다니고 하는 곳이었는걸요. 덕분에 이 근방 재래시장 구경도 하고, 버스 타고 다닐 땐 죽어도 못 봤던 큰길도 갔습니다. 그쯤 갔을 때에는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어떠랴 하는 기분으로 걸었습니다. 뭣하면 사람들한테 물어서 가도 될 테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방을 나선 지 40여 분쯤? 이쯤 되니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조건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재밌었던 건 제가 서쪽으로 향해 걸을 때, 그냥 일직선으로 걸었던 게 아니라 느슨하지만 꾸준히 아래를 향해서 대각선 방향으로 걸었는데도 계속 같은 높이의 언덕이 나왔다는 거였지요. 뭐 워낙에 고지대인 동네니까 그러려니 했어요. 그래도 걷고 걸으니 언덕도 끝나고 큰길이 보였어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바로 옆에 큰 교회를 낀 내리막길이었고, 편의점 앞 파라솔에 고등학생 티가 나는 젊은 남자들 서너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죠. 저는 그걸 보면서 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는 곳이더군요. 근처 번화가로 나갈 때 버스를 타고 다니던 큰길가였습니다. 그제서야 제가 얼마나 와 있는지 감이 오더라구요. 버스로 다섯 정거장쯤? 이만 하면 어지간히 도착하겠다 싶어 좀 빨리 걸었습니다. 그런데 큰길로 걷는 건 너무 심심했어요. 그래도 모르는 길이니까, 모험을 하면서; 걷기에는 시간 여유가 없었으므로 계속 큰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었습니다.

 

제가 아는 대형 마트가 보였어요. 얼마 안 가면 초등학교도 나올 텐데 그 초등학교 주변 골목길은 정말 잘 아는 곳이었기에 저는 주저 않고 마트 옆 골목길로 들어갔습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제 방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요. 이 골목길에서 저는 열심히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방이 언덕 꼭대기에 있거든요. 가다 보니 초등학교 건물과 운동장도 스쳤고, 두어 번 가본 동네 카페도 지나쳤습니다. 시계를 보니 어언 한 시간째. 주변 풍경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주말 저녁 주택가였지요.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지나가는 아주머니들, 이어폰을 끼고 걸어가는 고시생들, 고양이 몇 마리, 택배 트럭 등등.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 걷던 저는 갑자기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봤던 큰 교회가 다시 보이는 거예요;; 저는 그 옆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중이었고, 심지어 아까 편의점 앞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던 젊은 남자들도 그대로였어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걸어와 보니 분명 아까 지나쳤던 큰길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시간도 아까랑 그대로! 땀이 주룩 흐르더라구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미친듯이,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아까 지나쳤던 마트 옆 골목 말고, 그보다 더 동쪽에 있는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어요. 역시나 초등학교가 보였고, 그리고 아까와는 또 다른 골목이었지요. 이번에는 맞겠지, 하고 정말 신중하게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십여 분쯤 걸었나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봤더니 웬걸......아까 그; 내리막길 교회 근처 편의점에 또 다다른 거예요; 시계를 보니 시간은 제대로 흘러 있었습니다만.

 

이쯤 되자 저는 산책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무서웠거든요. 아니 이거 뭐 내가 홀렸나 싶고, 핸드폰은 두고 나왔고, 더 늦게 들어갔다가는 마감도 못 지킬 것 같고 심지어 눈물이 울컥 나려고까지 했어요. 그때 동네 사람들은 되게 웃겼을 거예요. 추리닝을 입은 웬 허름한-_- 여자가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질린 얼굴로 초조하게 걸어가니; 저는 이 동네 골목을 훑어보겠다는 개뿔이고 무조건 큰길! 버스가 쌩쌩 지나다니는 큰길로 돌아 돌아 간신히 집에 도착했습니다. 평소에는 욕을 한바가지 퍼부으며 올라다니던 집 앞 언덕길이 어찌나 반갑던지.

 

집에 오자마자 마감은 두고 지도부터 찬찬히 보았습니다만, 아무리 봐도 제가 의도한 루트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로드뷰로 하나하나 훑어보았지만 제가 걸었던 방향이 옳았어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저는 그렇게 길을 두 번이나 잃었던 걸까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당분간 저는 그 쪽으로는 산책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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