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2013.10.30 17:50

Koudelka 조회 수:2920

    얼마 전, 해마다 이맘 때면 가게 되는 나름 긴 일정의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벌써 몇 년째 묵는 그 외곽의 호텔을 찾아 투숙하기 위해 중앙역 어딘가에서 출발하는 메트로를 타고 구간 거리가 꽤 먼 그 곳으로 갔지요.역에서 내려 호텔을 향해  무거운 가방을 끌며 한참을 걷는 길엔 말농장도 보이고 작년인가 언제인가는 싱싱하게 자란 무청들이 날씨가 벌써 가을인 지 모르고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던 밭길을 한참 걷기도 했지요.

 

     왜 어째서 이 호텔이냐 하면 그건 저도 모릅니다. 아니 이유는 출장 목적의 행사장 부근은 비싸기 때문이겠지요. 제 선택에 관계없이 몇 해 전부터 이곳에 드나들던 전임자의 출장 견적이겠지요. 그렇다고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제 일정은 늘 그렇듯 저녁 무렵 도착하여 체크인 한 뒤 짐을 풀고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 전날 까지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멍하게 한참을 그 나라의 홈쇼핑 방송을 봅니다. 저는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출장을 오는 사람처럼 아직 잠이 덜 깬 몸과 마음으로 멍하게 테레비젼의 화면을 응시하는 이 순간을 너무 오래 그리워했습니다.

 

    GS홈쇼핑의 수십 억 매출기록을 세운 쇼호스트 만큼 방정맞지는 않지만, 이곳에도 양식진주 세트를 두르고, 바르기만 하면 주름 및 노화가 진행되는 것을 더디게 도와주는 화장품을 바르며 약간의 호들갑을 떠는 쇼호스트를 보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유럽 답게 10월 중순의 바깥 날씨는 초겨울 같고, 아직 본격적인 난방이 가동되지 않은 방이 조금 추워서 제 맨발의 발가락이 조금 더 가늘고 하얘지는 것 같은 착시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렇게 바라던 고요한 정지의 순간입니다. 이따금 가게 되는 출장에서 저는 늘 그 호텔에 완전한 객이 되어, 아무 방해없이 의식없이 그 공간에 담기는 것에 대한 중독적 그리움을 갖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갔었던 어느 곳은 텔레비전의 호텔 홍보 동영상의 배경음악을 '천공의 성 라퓨타' 피아노 연주곡으로 깔아뒀었지요. 완전히 깜깜한 채로 잠들지 못하는 저는 역시 조명삼아 밤새 텔레비전을 켜놓고 며칠을 잠들었는데 그 음악이 계절을 앞당기는 전령사가 됐는지 그 짦은 사이 가을이 와 버린 양 하늘이 높고 바람이 서늘하여 여름원피스 밖으로 나온 맨다리가 오돌토돌 해졌었죠. 

    
      오래 전, 저는 아주아주 미치도록 결핍된 편한 잠을 자기 위해 동네의 어느 호텔로 혼자 기어들었습니다. 언제나 겁쟁이였던 제가 선택한 안전과 위생 면에서 나빠보이지 않는, 모텔보다는 등급이 높은 곳이었죠. 대낮에 혼자 투숙한 여자를 보는 프론트 데스크의 눈은 다분히 의혹에 찬 것이었지만, 저는 미치도록 잠이 왔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잠을 자고 싶었으니까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몇 대의 담배를 연속으로 피우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정말 죽은 듯이 잤었던 몇 시간이 제 인생의 아주 사소한 비밀입니다. 제게 호텔은 늘 잠에 연관된 곳이지요.그것을 떠나 다른 목적은 썩 불충분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랬네요.

 

    청춘시절 어떤 누구도 제게 호텔에서 잠을 자자고 하거나 또는 호텔을 예약해 놨다고 은밀하게 속닥거리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죠. 대개는 제 자취방으로 기어들거나 아니면 모텔이었습니다. 호텔에서 애인과 뜨거운 정사를 나누고 팔목을 다 가리는 긴 장갑을 끼고 나서면 벨보이조차 좀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는 그레이스 켈리 흉내를 내볼 것도 아니고, 한 벌에 수십 만원을 호가하는 속옷으로 무장하고 맨정신에는 도무지 시도해 볼 수 없는 고난도의 체위를 펼쳐보일 만한 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늘 남자와 호텔에서 밤을 보내는 여자들은 저와는 급이 다른, 남자의 지갑을 선뜻 열게 만드는 매혹적인 그 무엇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아, 이것은  사실 아주 약간의 열등감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다시 서울, 내년에 다시 그 방으로 기어들어갈 수 있을지 어떨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내내 이 방이 딱 제 싸이즈 같다는 생각을 하며 지내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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