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소바

2019.06.24 17:23

은밀한 생 조회 수:1713

우리는 냉소바를 먹으러 갔어요.
그 식당은 계산대 뒤로 오픈 키친인 구조예요.
음식이 나오면 직접 가서 받아와야 하죠. 계산대에는 앳된 여자 알바분이 있었고 오픈 키친에서는 사장님 또는 적어도 책임자로 보이는 분이 요리를 하고 있었어요.. 가게가 협소해서 모두가 서로의 상태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죠.

냉소바가 나왔습니다.
저의 지인은 냉소바를 가지러 갔지요. 평소 같으면 저도 함께 일어나서 받으러 갔을 텐데, 마침 업무 카톡에 답을 하느라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저의 지인이 자리에 돌아와 조용히 앉더니 “소바를 엎질렀어” 하면서 옷을 닦더라고요. 알바분이 한 손으로 소바가 놓인 쟁반을 내밀었고, 저의 지인이 그걸 두 손으로 받아들기 전에 알바분이 먼저 손을 놔버려서 냉소바가 다 엎어졌답니다. 지인 옷에도 다 튀고요. 그니깐 쟁반을 저쪽에서 주면 이쪽에서 보통 두 손으로 쟁반 양쪽을 잡잖아요. 그 양쪽을 잡으려고 한 순간 손을 너무 일찍 놔버린 거죠.
그 순간 요리하던 남자분이 죄송하다고 얘기를 했고 정작 손을 놔버린 알바분은 멀뚱 보고만 있더래요. (보통 그런 경우에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하든가 옷을 닦을 물티슈를 주지 않나요...) 물론 알바분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쟁반이 순간 무거워서 얼른 놔버린 걸수도 있지요. 제가 당사자였다면 아마 “헉 그렇게 빨리 놓으시면 어떡해요 ;;;”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지인분이 평소에 굉장히 까칠한 타입이에요.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자신의 까칠함과 분노를 억누르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요. 화내고 나면 몸이 아파요... 스트레스가 응급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병을 앓고 있기도 하고. 무례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굉장히 욱해서, 그런 것들에 해탈하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고 또 많이 나아지기도 했어요. 여튼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옷을 닦고 숨을 고르던 그 지인이 결국 새로 만든 소바를 직접 들고 온 알바생에게 한마디 했어요. “최소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남자분이 대신 사과해야 돼요?” 이때 요리하던 남자분이 우리 자리로 왔어요. “이 친구가 몰라서 그런 거고요.. 제가 아까 사과를 다 했고요..휴, 뭐 여튼 식사하세요” 그러길래. 아... 이거는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제가 얘기를 했어요. 쟁반 다 받아들기 전에 손을 놔버려서 음식이 엎질러졌고 옷에 튀었고, 그럼 반사적으로 미안하다는 얘기가 먼저 나오지 않냐고. 어떤 서비스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것은 이해한다고. 근데 길 가다 발을 밟아도 먼저 미안하단 말부터 반사적으로 나오지 않냐고. 그랬더니 알바분은 고개를 끄덕하면서 미안하단 눈빛을 보냈고, 요리하던 남자분은 “그래서 제가 아까 사과드렸고요” 라는 말을 반복.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저의 지인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아무래도 식사를 계속 하면 안될 거 같아서.
주문한 음식에 손도 안 대고 나와버렸어요. 우리는 대략 5분 정도 말없이 걸었고 저의 지인이 “미안해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괜히 한마디 해가지고. 밥도 못 먹었네” 라고 말했지요.

여러분 의견은 어떠신가요.
저의 지인이 정말 그냥 참았어야 했을까요?
그 알바분이 낯을 많이 가려서 또는 손에 힘이 없어서 놓쳤을 거다 이해하면서 옷을 슥슥 닦고 식사를 즐겁게 마쳐야만 했을까요? 저의 지인이 과연 너무 예민하게 군걸까요? 그 식당의 요리사 남자분과 알바분은 아마 저희를 두고 겁나 (뭐 ㅈ나라고 하겠죠) 진상이다 가다가 넘어져라 어쩜 저렇게 이해심이 없냐 할 것도 같아요. 저는 한편으로는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생각도 들고 저의 지인 기분도 이해가 되고 그러긴 하는데. 저라면 과연 어땠을까... 끝까지 미안하단 말을 듣기 위해 따져 물었을까? 그냥 식사를 조용히 마치고 나왔을까? 아님 웃으면서 와 연약한 분이구나 쟁반도 못 들고 놔버리시네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드네요. 저의 지인이 자기 스스로 너무 예민한 게 아닌가 해서 꾹 참아 버릇하는 것도 안쓰럽기도 하고...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얘기할 때 알바분이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하면서 생글거렸는데. 저의 지인은 그 눈빛을 미안한 눈빛이 아니라 비웃는 눈빛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너는 지껄이세요 나는 웃을게요. 그런 거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389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229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0668
32 몽실언니 [10] 왜냐하면 2018.06.20 1632
31 데님 드레스 & 언니옷 뺏어입기 (물론 아가씨 사진) [6] 샌드맨 2015.12.07 1005
30 [구걸] 생일입니다. 축하해주세요. 굽신굽신. 굽신. 구웁신. [62] 이인 2013.01.14 1642
29 [가벼운 멘붕치유 이미지 스압글] 주의! 문재인 이미지 빅사이즈 다량 포함. [14] Thule 2012.12.24 3733
28 [바낭] 종영 기념 '본격 응답하라 1997 까는 글' 입니다(...) [25] 로이배티 2012.09.19 4428
27 [디아블로 3]의 징크스? [1] 晃堂戰士욜라세다 2012.07.12 995
26 (듀나인) 갤럭시노트를 선물받았는데, 기존 스마트폰을 어떻게 하나요? [3] pennylane 2012.07.05 2193
25 [아이돌] 인피니트 '추격자' 뮤직비디오 [14] 로이배티 2012.05.15 2948
24 단문 스누피 업데이트 [8] sweet 2012.05.08 1534
23 셀프 생일선물 투척 [12] BeatWeiser 2012.05.03 2969
22 이제 곧 6시. 칼퇴근 하고 싶은 분들? [5] 자본주의의돼지 2012.02.02 1294
21 김영하씨는 [16] 닥터슬럼프 2012.01.08 4528
20 신년 책 선물 및 자기연민에 대하여 [6] 물긷는달 2012.01.02 2800
19 [듀나인] 보편적 깔깔거림이 있는(응?) 단편만화책 추천해 주세요~ [4] 해파리냉채 2011.12.08 1548
18 [듀나인] 손난로 추천해주세요~ [2] 한~량~ 2011.11.21 1310
17 미국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6] 가끔영화 2011.08.12 2657
16 [바낭?] 보고싶고, 그립습니다, 안 선생님..[그림有] [3] miho 2011.07.17 2433
15 저는 무서운(?) 사람이었네요. [11] miho 2011.07.04 3257
14 금발 수지와 하얀공의 소녀 [6] 자두맛사탕 2011.06.28 2404
13 [듀나인]한메일로 한글파일 보낼때 파일이름이 깨지는 현상?? 마루코 2011.06.20 1276
XE Login